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국익 위에 당론, 임금 갈아치우는 쿠

화이트보스 2009. 5. 18. 19:38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국익 위에 당론, 임금 갈아치우는 쿠데타 명분으로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① 西人들의 왕

이덕일 | 제101호 | 20090215 입력
왕조국가의 기본 의리는 군위신강(君爲臣綱)이다.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란 뜻이다. 그러나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들은 당론의 시각으로 광해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명나라 황제가 자신들의 임금이 되고 광해군은 그 신하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불충한 광해군을 축출하는 것이 충성이란 해괴한 논리가 쿠데타의 명분으로 성립되었다.
서울 은평구 역촌동에 있는 인조 별서 유기비(別墅 遺基碑) 비각. 인조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 살았던 곳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당시 백성들은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이원익이 영의정으로 임명되자 민심이 안정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광해군이 어린 영창대군에게는 신경 쓰고 장성한 능양군(인조)을 주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능양군의 부친이 정원군(定遠君)이기 때문일 것이다. 광해군의 모친 공빈(恭嬪) 김씨의 연적(戀敵)이던 인빈(仁嬪) 김씨 소생의 정원군은 백성들의 공적(公敵)이었다. 정원군은 임진왜란 때 백성들이 체포해 일본군에게 넘긴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과 함께 악명 높은 세 명의 왕자였다. 임해군과 정원군은 심지어 사노(私奴)를 잠상(潛商)으로 삼아 일본군과 내통하며 이익을 취했다. 선조 30년(1597) 1월 사노 희남(希男)이 간첩 혐의로 포도청에 체포되자 정원군은 임해군과 함께 포도대장에게 서신을 보내 석방을 요구했다. 이를 안 사헌부에서 임해군·정원군의 파직을 요청했으나 선조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해 6월에는 정원군의 하인들이 길을 다투던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의 하인을 집단 폭행해 유혈이 낭자한 채 실려가는 사건도 있었다. 9월에는 정원군이 지방으로 행차할 때 하인들이 쇄마(刷馬:지방 관아의 말) 200필에 실을 정도의 금품을 약탈했다. 전란에 피폐해진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지자 사헌부에서 추고(推考:수사) 요청을 했으나 선조는 “주인이라고 해서 하인들이 한 일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선조실록』 35년(1602) 6월조의 사관은 “여러 왕자 중 임해군과 정원군이 일으키는 폐단이 한이 없어 남의 농토를 빼앗고 노비를 빼앗았다”며 “가난한 사족(士族)과 궁한 백성들이 자기의 토지를 잃고도 항의할 수도 없어 중외가 시끄러웠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해 9월에는 정원군의 하인들이 선조의 맏형인 하원군(河原君:정원군의 백모)의 부인을 납치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사간원에서 ‘인간의 도리상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했으나 선조는 “살펴서 조치하겠다”고 무마했을 뿐이다.

『선조실록』에는 정원군의 패륜 행위에 대한 사실이 수없이 실려 있으나 서인들이 작성한 『광해군일기』는 정원군에 대해 “어려서부터 기표(奇表:우뚝한 외모)가 있었고 천성이 우애가 있었다”라고 극찬하고 있으니 지금처럼 당론(黨論)에 눈이 멀면 흑백(黑白)을 불분(不分)함을 알 수 있다. 정원군이 조야에서 버림받은 인물이기 때문에 광해군은 그 아들 능양군이 쿠데타의 주역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능양군은 동생 능창군(綾昌君)이 ‘신경희의 옥사’에 연루돼 처형당했기 때문에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능양군의 친동기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남편인 신익성(申翊聖)이 쓴 『연평일기(延平日記)』에는 인조반정이라 불린 쿠데타의 진상이 자세하다. 쿠데타 주역 이귀(李貴)는 자신의 부인상에 문상 온 신경진(申景진)을 모의에 끌어들였다. 광해군이 재위 14년(1622) 8월 이귀를 황해도 평산(平山) 부사로 임명하자 부임 도중 장단(長湍) 방어사 이서(李曙)를 끌어들였다. 이때 평산과 개경 사이에 호랑이가 출몰해 인명을 살상했는데 이귀는 큰 호랑이를 잡아 바치고 기뻐하는 광해군에게 “호랑이 사냥을 하다가 경계를 넘어가면 쫓을 수 없는데 경계에 국한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속셈을 모른 광해군은 허락해주었다.

그해 12월 이귀는 장단방어사와 함께 발병(發兵)하려 했으나 유천기(柳天機)가 고발해 사전에 발각되었다. 『연평일기』는 “다행히 유희분·박승종 등의 주선으로 파직에 그치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인목대비 폐모에 반대했던 소북(小北) 유희분·박승종으로선 이 사건의 여파가 인목대비에게 미칠 것을 염려했다는 것이다. 북인들도 인목대비 문제에 발목이 잡혀 역모를 눈감아 준 형국이니 광해군의 몰락은 인목대비 폐모로부터 나왔다. 김시양(金時讓:1581~1643)의 『하담파적록(何潭破寂錄)』에는 반정 일등공신이 되는 김자점(金自點)이 김 상궁에게 뇌물을 써서 막았다고 달리 전한다.

광해군(1623) 15년 3월 12일 반정 당일, 쿠데타 세력은 밤 2경(9~11시) 홍제원(弘濟院)에 모이기로 했는데 그 전에 광평대군의 후손 이이반(李而頒)이 고변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군사는 절반도 모이지 않았고 거의대장(擧義大將) 김류(金류)도 나타나지 않았다. 『연평일기』는 김류가 “고변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잡혀갈 때만 기다리면서 감히 나오지 못했다”고 전한다. 북병사(北兵使) 이괄(李适)이 대신 쿠데타군을 지휘했는데 김류는 집까지 찾아온 심기원(沈器遠)·원두표(元斗杓)의 재촉을 받고 뒤늦게 나타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이렇게 쿠데타군 진영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가 광해군의 마지막 기회였으나 이마저 놓쳐버렸다.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에 따르면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의 아들인 경기감사 박자흥(朴自興)이 쿠데타 소식을 듣고 양주(楊州)로 달려가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의 사위인 수원 방어사(防禦使) 조유도(趙有道) 등에게 군사 진압을 명했다. 그러나 결국 진압에 실패하고 박승종·박자흥 부자는 자결하고 만다.

인조반정은 성공했으나 백성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폐모는 양반 사대부에게는 강상(綱常)의 문제였지만 백성에게는 늘 있던 궁궐 권력 다툼의 하나에 불과했다. 반정 일등공신 이서(李曙)는 반정 직후 백성들의 반발을 기술하면서 ‘성패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터에 위세로써 진압할 수도 없었다’라고 적어 내심 당황했음을 말해준다. 이때 서인들이 난국타개책으로 제시한 것이 남인 이원익(李元翼)의 영의정 제수였다. 이원익은 폐모에 반대하다 여주에 유배 중이었는데 『인조실록』 1년(1623) 3월 16일자는 “인조가 승지를 보내 재촉해 불러왔다.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도성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하였다”고 적고 있다. 서인들이 남인을 영상으로 영입한 것은 그만큼 쿠데타에 대한 지지가 높지 않았음을 뜻한다.

광해군은 서인들에게는 몰라도 백성에게는 나쁜 임금이 아니었다. 『연려실기술』은 ‘이원익의 연보(完平年譜)’를 인용해 쿠데타 직후 인목대비와 반정공신들이 광해군을 죽이려 하자 이원익이 “그를 섬긴 노신(老臣)으로서 차마 들을 말이 아니니 조정을 떠나겠다”고 반발해 죽이지 못했다고 전한다.

쿠데타 당일 광해군의 부인 유씨는 대궐 후원 어수당(魚水堂)에 이틀 동안 숨어있었다. 조선 후기 성해응(成海應)의 ‘초사담헌(草사談獻)’에는 유씨가 궁인(宮人) 한보향(韓保香)에게 “중전이 여기 계시다”라고 소리치게 한 뒤 체포하러 온 대장(大將)에게 “오늘의 거사는 종사를 위한 것인가 부귀를 위한 것인가”라고 따졌다고 전해준다. 유씨는 남편이 쫓겨나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광해군과 왕비 유씨는 강화에 위리안치되고 세자 이지(李지)와 세자빈 박씨는 강화 교동(喬桐)에 안치되었다. 세자는 그해 5월 땅굴 70여 척을 파서 탈출을 시도하는 조선판 ‘쇼생크 탈출’을 연출했으나 나졸 최득룡(崔得龍)에게 붙잡혔다. 그가 소지하고 있던 ‘황해순영 서간(黃海巡營書簡)’ 등은 군사를 일으킬 계획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날짜 『인조실록』은 “최근 도성 안에서 유언비어가 날로 생겨난다”라고 적어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는 민심이 상당함을 말해주고 있다. 세자가 체포된 지 사흘째 세자빈 박씨는 목을 매 자결했고, 인조는 한 달 후 세자를 사형시켰다. 세자는 ‘자결할 줄 몰랐던 것이 아니라 부모의 안부를 알고 나서 죽고자 했던 것’이라면서 의관을 정제한 다음 손톱과 발톱마저 깎으려 했으나 금부도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세자는 “죽은 뒤에 깎아주면 좋겠다”고 말한 후 황천(皇天)·후토(后土)와 광해군이 있는 서쪽을 향해 절한 후 목을 매 자결했다.

조경남(趙慶男)의 『속잡록(續雜錄)』에는 세자가 교동에서 “어떻게 이 새장을 벗어나, 녹수청산 마음대로 오고 갈까(綠何脫此樊籠去 綠水靑山任去來”라는 시를 지었다고 전해준다. 인조반정은 특정 당파가 당론으로 국왕을 갈아치울 수 있는 상태까지 왔음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왕조 정치의 파탄이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명에 대한 반역으로 규정한 이들은 숭명반청(崇明反淸)을 기치로 내걸었다. 대륙의 만주족과 전쟁을 예고하는 정책전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