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홍과 삼천의병(100Χ73cm): 남명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은 임란이 발생하자 57세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켜 경상우도의 의병 총지휘자 역할을 했다. 조식의 제자 대다수가 의병을 일으킨 것은 임란 말기 북인의 집권 명분이 되었다. 우승우(한국화가) |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제자들인 북인은 임란이 발생하자 수제자 정인홍(鄭仁弘)을 필두로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조종도(趙宗道)·이노(李魯) 등이 대거 의병을 일으켰기 때문에 집권 명분이 충분했다.
남인 이원익의 영상 제수는 연립정권으로 전후 복구에 임하겠다는 광해군의 정국 구상을 표출한 것이었다. 세자 시절 도움을 받은 대북만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광해군은 즉위년 2월 25일 내린 ‘비망기(備忘記)’에서 “근래 국가가 불행히도 사론(士論)이 갈라져 각기 명목(名目:당파)을 만들어 서로 배척하고 싸우니 국가의 복이 아니다”며 “지금은 이 당과 저 당(彼此)을 막론하고 오직 인재를 천거하고 현자를 등용해 다 함께 어려움을 구제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견지에서 광해군은 즉위년 5월 서인 이항복(李恒福)을 좌의정으로 발탁했다. 남인·북인·서인을 아우르는 연립정국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속마음이 대북에 있다는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 대북의 핵심은 정인홍이었다. 그는 선조 41년(1608) 1월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던 소북 영수 유영경을 비판하다 선조로부터 ‘무군반역(無君叛逆)의 무리’라는 꾸짖음과 함께 평안도 영변으로 유배돼 있었다. 율곡 이이가『석담일기(石潭日記)』 선조 14년(1581)조에서 “정인홍은 청명(淸名)이 있어서 세상에서 중히 여겼는데 장령(掌令)에 제수되니 사람들이 다 그 풍채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한 것처럼 산림(山林)의 존경을 받았다.
임진년 4월 왜란이 발생하자 57세 고령으로 곧바로 의병을 일으켰는데『선조실록』 26년 1월자는 그 숫자를 3000명이라 적고 있다. 정인홍은 광해군 즉위 이전부터 영남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선조 35년(1602) 윤2월 서인 강경파 부사과(副司果) 이귀(李貴)가 호남의 폐단으로 토호(土豪)들의 탈세를, 영남의 폐단으로 선비들의 수령(守令) 핍박을 지목하면서 정인홍을 장본인으로 지목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이를 말해 준다. 그러자 경상도의 유생 오여은(吳汝穩)이 ‘정인홍은 봉황 같은 사람인데 이귀가 없는 사실을 날조했다’는 반박 상소를 올렸고, 그때의 사관은 “정인홍은 조식의 고제(高弟)로서 기절(氣節)로 자부했는데 많은 선비가 내암(萊庵) 선생이라 높였다”고 말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정인홍을 석방하라는 상소가 잇따르는 가운데 과거 그를 비판했던 함흥 판관 이귀(李貴)까지 “신과 정인홍이 원래 서로 용납하지 않는 것은 국인(國人)이 다 알고 있다”며 “정인홍은 선비(儒)라는 이름이 있고 나이도 70세인데 만 리나 먼 유배지로 가다가 길에서 죽는다면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석방을 주청한 것처럼 광해군이 복귀한 이상 그의 복귀는 시대의 당위였다. 광해군은 선조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부친의 결정을 뒤엎는 것에 부담을 느꼈으나 2월 23일 ‘정인홍이 길에서 죽는다면 선왕의 뜻이 아닐 것’이라며 석방했다. 3월에는 그를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하고 5월에는 대사헌으로 임명해 그에 대한 속마음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 정권에 참여한 다른 당파들도 전란 극복에 힘을 보탰다. 전후 복구에 초당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광해군 즉위년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도에 대동법이 실시되고 재위 2년 허준(許浚)의『동의보감(東醫寶鑑)』이 편찬되고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기 위한 양전(量田)사업도 추진되는 등 광해군의 주요 업적이 이 시기에 집중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물론 이때도 당파 간 충돌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임해군 문제인데, 남인 이원익이 임해군을 살려주어야 한다는 전은론(全恩論)을 주창한 반면 정인홍은 대의를 위해 사연(私緣)을 끊어야 한다는 할은론(割恩論)을 주창했다. 임해군은 광해군 1년(1609) 4월 유배지에서 사형당해 할은론이 승리하지만 그는 당파를 막론하고 인심을 너무 잃었기에 문제가 확대되지는 않았다.
각 당파가 정면충돌한 사건은 문묘종사(文廟從祀) 문제였다.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제사 지내는 것이 문묘종사인데 종사되는 인물들의 사상이 국가의 지도 이념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광해군 즉위년 7월 경상도 유생 이전(李琠) 등이 오현(五賢)의 문묘종사를 청한 것을 시작으로 성균관 유생과 홍문관에서 거듭 오현종사를 요청했다. 오현은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을 뜻한다.
당초 이 문제가 나왔을 때 광해군은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을 알았다”고 칭찬했으나 막상 그 시행은 ‘선왕도 어렵게 여겼다’며 유보하고 재위 2년(1610) 3월에는 이 문제의 제기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요구가 거세지자 재위 2년(1610) 9월 문묘종사를 허락했다. 이것이 연립정권 운영자였던 광해군의 한계였다. 광해군은 오현 그대로를 문묘에 종사해서는 안 되었다. 오현 선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굉필·정여창·조광조는 모든 당파에서 동의하는 인물이지만 이언적과 이황은 아니었다. 남인의 지주인 이언적·이황은 포함된 반면 집권 북인의 종주인 남명 조식은 누락된 것이다.
과연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은 광해군 3년(1611) 3월 상소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이 지난 을사년(1545)과 정미년(1547) 사이에 벼슬이 극도로 높거나 청요직(淸要職:승지 또는 대간 등)을 역임했는데 그 뜻이 과연 벼슬할 만한 때라고 여겨서입니까?”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동생이었던 척신 윤원형이 주도한 을사사화와 정미사화(양재역 벽서사건) 때 이언적과 이황의 행적에 문제가 있다는 비난이었다. 이언적은 명종 2년(1547) 윤원형 등이 주도한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귀양 가지만 율곡 이이가『석담일기』에서 “을사사화(1545) 때 직언으로 항거해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했듯이 을사사화 때 종1품 의정부 좌찬성으로 있었다.
이황도 명종 7년(1552) 6월 윤원형의 심복인 정준(鄭浚)이 사헌부 집의로 임명된 날 홍문관 부응교로 임명됐다. 같은 날 사관(史官)이 “이황은 학행이 참으로 뛰어난 선비인데, 윤원형의 조아(爪牙)인 정준과 같은 날 관직을 제수했으니 향기 나는 풀과 악취 나는 풀(훈유)을 어찌 한 그릇에 담을 수 있겠는가?”라고 비판한 것처럼 이황도 명종 때 관직에 있었다. 반면 조식은 명종 10년(1555) 단성현감에 제수되자 사직 상소에서 “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해 천의(天意)가 떠나갔고 인심도 떠났다”고 비판하면서 윤원형의 누이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대의 금기까지 거론했다.
이때 사림은 조식에 환호하고 열광했으므로 광해군은 조식까지 포함한 육현(六賢) 종사로 유도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한 정인홍에 대해 서인과 남인은 선현을 헐뜯었다고 일제히 공격했고 태학생들은 유생들의 명부인『청금록(靑衿錄)』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했다. 그러자 광해군은 “이 사람은 임하(林下)에서 독서하면서 시종 바른 선비의 길을 고수한 사람”이라며『청금록』삭제 주동자를 조사해 아뢰라고 명했으나 오현 문묘종사를 허락할 때부터 이 문제는 예견돼 있었다. 연립정권은 이렇게 문묘종사라는 민생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변적 현안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