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소통과 통합에 실패한 군주, 외롭게

화이트보스 2009. 5. 18. 19:39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소통과 통합에 실패한 군주, 외롭게 몰락하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광해군⑤ 소수파의 임금

| 제100호 | 20090208 입력
모든 권력에는 독점 추구의 속성이 있다. 그러나 국왕은 각 당파의 당론을 조절하는 방향으로 왕권을 행사해야지 한쪽의 권력 독점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즉위 초 광해군은 연립정권을 구성해 전란의 상처 극복에 나섰으나 곧 소수 강경파에게 경도되어 조정자의 지위를 포기했다. 그 결과 그는 대북을 제외한 모든 당파의 공적이 돼 몰락하고 말았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에 있는 광해군 묘. 광해군은 대북 강경파에게 경사돼 인목대비의 생부와 친아들을 죽이고 인목대비까지 폐위시키는 바람에 유교정치 체제의 공적이 되었다. 작은 사진은 인목대비가 병 치료에 관해 쓴 서한이다. 인목대비는 한문에도 능했다. 사진가 권태균
집권 북인은 현실적으로 소수당이었다. 서인이 제1당, 남인이 제2당, 북인이 제3당이었다. 그러나 절의(節義)를 숭상했기 때문인지 북인은 다른 당파와 충돌이 잦은 것은 물론 당내에서도 분란이 잦았다. 선조 32년(1599) 11월 남인 영상 이원익(李元翼)이 선조에게 “동론(東論: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렸는데 북인은 또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렸습니다”고 개탄한 것처럼 북인은 뿌리가 같은 남인과 합당하는 대신 대북·소북으로 나뉘었다.

북인 분당의 계기는 선조 32년 3월 북인 홍여순(洪汝諄)의 대사헌 임명 때문이었다. 홍이 대사헌에 임명되자 석 달 후 다른 부서도 아닌 사헌부에서 “‘홍여순은 평생 경영한 일이 모두 재산을 불리고 사치를 일삼는 것’이고 북도순찰사(北道巡察使) 시절에는 사람을 풀처럼 여겨 함부로 죽였으므로 온 도(道)의 사람들이 그 살점을 먹으려 했다”고 탄핵할 정도였다. 훗날 백호(白湖) 윤휴가 좌참찬 윤승길(尹承吉)의 ‘영의정 추증 시장(諡狀)’에서 ‘윤승길이 병조참판일 때 병조판서 홍여순이 뇌물을 멋대로 받아 챙기자 병조의 인사가 있는 날(政日)이면 그와 한자리에 앉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다’고 기록할 정도다. 조광조로 대표되는 대사헌의 이미지로는 맞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당론이 앞서면 진실을 외면하듯 홍여순을 지지하는 이산해·이이첨 등의 대북과 홍여순을 비판하는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의 소북으로 분당됐다. 그나마 대북은 선조 33년(1600) 홍여순과 이산해 사이에 다툼이 발생해 이산해가 육북(肉北), 홍여순이 골북(骨北)으로 다시 나뉘었다. 소북도 세자 광해군을 지지하는 남이공 중심의 청북(淸北: 또는 남당)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유영경(柳永慶) 중심의 탁북(濁北: 또는 유당)으로 나뉘었다.

광해군 즉위에 결정적 공을 세운 대북은 권력을 독차지하려 했으나 즉위 초 광해군은 이조판서와 이조전랑, 승지와 대간 등의 실직(實職)은 대북에게 주었으나 최고위직인 정승은 서인(이항복)과 남인(이원익·이덕형)에게 주어 연립정권을 구성했다. 대북은 광해군의 통합적 정국 운영에 불만을 가졌으나 전란 극복에 전 당파의 합심이 필요하다는 논리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연립정권은 문묘종사(文廟從祀) 문제로 공존의 기반이 크게 흔들렸다. 집권당이면서도 종주(宗主) 남명 조식을 종사하지 못한 상황에 큰 불만을 가진 대북은 연립정권 내 다른 당파들의 축출을 구상했다. 광해군 4년(1612)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대북의 이런 정국 구상에 이용되었다. 봉산(鳳山) 군수 신율(申慄)에게 ‘김경립(金景立: 일명 김제세)의 군역(軍役)을 면제하라’는 관문(關文: 상급 관청의 공문서)이 내려왔는데 예조에는 없는 예조참지(禮曹參知)란 직명이 쓰여 있었다. 조사 결과 관문에 사용된 어보(御寶)와 병조인(兵曹印) 등이 모두 위조된 것이었다.

승려였던 김경립은 환속 후 군역의 과중함을 견디다 못해 관문서를 위조한 것인데, 이 단순한 사건은 순화군(順和君: 선조의 6남)의 장인 황혁(黃赫)이 순화군의 양자 진릉군(晋陵君) 이태경(李泰慶)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이 사건의 추관(推官)이던 판의금 박동량(朴東亮)은 무리한 옥사라고 주장했고 김시양(金時讓)도『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에서 “도적이 죽음을 늦추고자 모반했다고 고변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이첨 등의 대북은 이 사건을 이용해 서인·남인·소북 계열의 반대파들을 쫓아냈다.

광해군 5년(1613) 4월에는 ‘칠서(七庶)의 옥(獄)’이 발생한다. 조령(鳥嶺)에서 한 상인이 살해당하고 은자 수백 냥을 탈취당한 사건인데 수사 결과 범인은 고(故) 정승 박순(朴淳)의 서자 박응서(朴應犀), 고 목사 서익(徐益)의 서자 서양갑(徐羊甲) 등 명가의 서자 7명이었다. 현실에 불만을 품은 서자들이 여주(驪州) 강가에 거처를 마련하고 공동생활을 하는 도중 일어난 사건이었으나 이 역시 대북에 의해 역모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작자 미상의『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는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정항(鄭沆)이 ‘역모로 고변하면 죽지 않을뿐더러 큰 공도 세울 수 있다. 김제남(金悌男: 인목대비의 부친)과 영창대군을 끌어들이라’고 박응서를 유혹했다고 전한다. 반면 안방준(安邦俊)이 묵재 이귀(李貴)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묵재일기(默齋日記)』는 “이이첨이 ‘살길이 있다’면서 박응서에게 ‘김제남과 짜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말하게 꾀었다”고 전한다. 김제남은 이에 대해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고 부인했고 아들 김규(金珪)와 여종 업이(業伊)도 마찬가지였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김제남은 광해군 5년(1613) 5월 사약을 받기 직전 “원컨대 한마디 할 것이 있다”고 청했으나 이마저 거부되고 사형당했다. 영창대군도 이 사건으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 1614년 2월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광해군은 이 사건의 진실을 추구하기보다 정적 제거라는 시각에서 사태를 바라봄으로써 대북 이외 다른 당파들의 불만을 샀다. 게다가 내친김에 인목대비까지 폐모하려는 대북을 제어하지 못했다. 『묵재일기』는 서인 이귀가 남인 영상 이덕형에게 “(김제남의) 옥사 이후에는 반드시 대비를 폐할 것이니 이 옥사를 구제하지 못하면 폐모할 때 목숨을 바친다 해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전하는 것처럼 서인들은 김제남의 사형을 폐모로 가는 중간 절차로 보았다.

폐모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왕권의 범위를 넘는 문제였다. 『광해군일기』는 남인 이덕형은 물론 영의정을 지낸 대북 기자헌(奇自獻)까지 광해군에게 “『춘추(春秋)』에서 아들이 어머니를 원수로 대할 의리가 없다고 한 것은 선유(先儒)가 정한 의논이고, 아들이 어머니를 끊는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반대한 것처럼 대북도 폐모에 모두 찬성하지 않았다. 서인과 남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남인 이원익·이덕형, 서인 이항복은 폐모론에 반대하다 귀양 가거나 쫓겨났으며, 소북 남이공도 반대했고 심지어 정인홍의 제자 정온(鄭蘊)은 사제 관계를 끊으면서까지 폐모론에 반대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대북 강경파 이이첨 등에게 휘둘려 당론 조절의 역할을 포기하고 내심 폐모론을 지지했다. 드디어 다른 당파를 모두 내쫓은 대북은 광해군 10년(1618년) 인목대비의 호를 삭거(削去)하고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복형제와 선왕의 장인을 죽인 것도 모자라 계모를 폐서인하는 광해군과 대북의 과잉조처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광해군을 유교정치 체제의 공적(公敵)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대북은 폐모론을 주도해 권력을 독점했으나 소수 정당의 한 파벌에 불과한 당세로서 무리한 권력 독점이었다. 광해군 말기 사방에서 고변이 잇따랐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광해군의 이복동생 능양군(綾陽君: 인조)과 서인 핵심부의 쿠데타 기도를 알아채지 못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기초 정보망조차 붕괴된 것인데 이런 대북에게도 쿠데타 당일 마지막 기회가 있었다.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광평대군의 후손 이이반(李而頒)은 길에서 만난 친족 이후원(李厚源)으로부터 “오늘 반정에 함께 참가하자”는 요청을 받았다. 이이반의 부친 이유홍(李惟弘)이 대북에 의해 귀양 갔기 때문에 권한 것이지만 이이반은 급히 광해군에게 고변했다.

하지만『광해군일기』는 어수당(魚水堂)에서 술에 취한 광해군이 이이반의 상소를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유희분·박승종이 두세 번 비밀리에 아뢰자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전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쿠데타 군이 들이닥치자 광해군은 북쪽 후원으로 도망가 사복시 개천가에 있는 의관 안국신(安國信)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고 말았다. 대외 문제에서는 탁월한 현실 인식을 갖고 있었으나 대내 문제에서는 소수 강경파에 휘둘려 당론 조절과 사회 통합을 포기했던 대북 군주의 허무한 종말이었다. <다음 호에는 전란을 겪은 임금 중 인조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