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 ⑧`無에서 有'를 창조한 한미연합사 창설

화이트보스 2009. 5. 18. 19:57

제1話 溫故知新 ⑧`無에서 有'를 창조한 한미연합사 창설

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이재전 예·육군중장

1978년 한미연합사(Korea-U.S. Combined Forced Command:CFC)를 창설한 것은 1968년 10월의 한미기획단 창설 및 71년 7월의 한미 제1군단(집단) 창설에 뒤이어 한·미 연합방위체제를 진일보시킨 획기적인 조처였다. 이는 1974년 4월 미국이 유엔사 대신 한국군을 작전통제하게 될 CFC의 창설을 제의하고, 그해 5월 한국이 이에 찬동해 CFC의 상위기구로서 군사위원회(MC)를 설치토록 하자는 안을 제시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돌이켜보면 한미연합사 창설은 말 그대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작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침을 받아 시작되었으나 그 지침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참고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육군대학 교재로 사용한 `통수강령'(統帥綱領)이라는 책을 번역, 그 내용을 한미연합사를 구성할 때 상당 부분 참고했다.

이를테면 `통수강령'에는 국적이 다른 군대로 연합군을 만들 때 상대방 지휘관은 범장(凡將)이 맡게 하고 우리 쪽은 탁월한 사람을 앉혀 헤게모니를 장악한다거나, 작전지휘권은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우리 쪽이 장악해야 한다거나 등등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원래 군사전략은 기밀이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일본 육군대학의 교재로 편찬된 `통수강령' 또한 기밀이었다. 당시 일본군 장교생활을 했다는 사람 중에도 그 책을 본 사람이 없었다. 일본 육군대학을 나온 한국인으로는 홍사익(洪思翊 ·1889~1946)장군이 유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일본이 패전하는 바람에 공개된 것을 일본에서 사다가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경기도 안성 출신인 홍장군은 1906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지만 1909년 고종황제의 명령에 따라 일본 육군 중앙유년학교(육군사관학교)에 편입되었다. 일본 육사(26기)를 졸업한 그는 1944년 중장으로 승진하면서 남방총군 병참감 겸 포로수용소 소장직을 맡아 필리핀에 부임했다.

그러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범으로 재판을 받아 1946년 9월26일 마닐라 남쪽 칸루방 포로수용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 57세였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까지 군인으로서 그가 끝까지 지킨 것은 일왕의 `군인칙유'가 아니라 광무(光武) 4년(1900년)에 만들어진 대한제국 황제의 `군인칙유'였던 것 같다고 일본 언론인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가 그의 저서(홍사익 중장의 처형)에서 적고 있다.

홍장군은 1946년 전범재판에서 포로학살·학대죄로 교수형을 당했다. 그러나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홍사익 중장의 처형'에서 전범재판을 “승자인 미국의 논리로 패자를 심판한 말도 안되는 정치쇼”라면서 “홍사익 중장은 무죄이며 시대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당시 이승만 박사도 홍장군의 높은 재능을 활용하기 위해 처형하지 말라고 미군에 탄원을 냈으나 끝내 극동군재판소에서 처형되었다.

일본 정부 발표에 따르면 1945년 패전 당시 일본군 안의 한국 출신 병사는 육군 20만5000명, 해군 2만2000명과 군속 15만5000명 등 모두 38여만 명이었다(종군위안부·노무자는 제외됨). 이 가운데 15만 명이 전사해 귀국하지 못했다.

비운의 홍장군과 달리 일본 육사나 학도병 출신으로 전쟁에서 살아 남은 자는 광복 후 엘리트로 대접받고 조국에서 건군(建軍)의 주역이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홍장군의 일본 육사 동기생으로는 광복군사령관으로 유명한 이청천 장군과 광복 후 대한민국 육군을 창건한 초대 참모총장 이응준 장군이 있다.

홍사익은 계림회라는 유학생 친목회 리더로서 친구 이청천·김광서 등 서울에 남아 곤경에 처한 선후배 광복군 지도자의 가족들을 비밀리에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식 발음으로 불리기는 했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한국식 이름을 고집했다. 그는 일본이 항복하자 부관에게 고국에 돌아가 수학선생이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미연합사 설치·구성을 위한 협상과정에서 한국은 주한미군 감축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군을 계속 작전통제할 가능성과 아울러 CFC의 운영에 한국군이 적극 참여한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그 결과 한·미 양국은 1977년 7월 제10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주한미군 선임장교가 CFC사령관이 돼 한국군 및 전시(戰時) 미군을 작전통제하되, 한·미 양국의 합참의장으로 구성된 MC로부터 부여되는 전략지시와 지침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고 참모요원도 양국 동수 편성을 원칙으로 하는 CFC 창설에 합의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78년 7월 제11차 SCM 에서 MC 창설, MC·CFC에 대한 권한 위임 사항, MC 전략지시 1호 등이 합의됨에 따라 그해 11월 CFC가 창설된 것이다. 그때 합참에서 주로 그 문제를 다룬 사람은 초대 연합사부사령관을 지낸 류병현(柳炳賢·80·예비역 대장·육사7기)장군이었다. 전임 합참 본부장이었던 류장군은 내가 그의 후임으로 가자 연합사부사령관으로 부임했다. 현재의 연합사 건물도 류병현 부사령관 당시 한국군 지원으로 지은 것이다.

2003.02.27 정리:김당 오마이뉴스기자 dangkim@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