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話 溫故知新 ⑨주한미군 철수론의 서곡(序曲) | |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1978년 11월 한미연합사 창설로 이어진 70년대의 주한미군 철수론은 미국 대통령이 바뀌는 동안 몇 차례 굴절을 겪어야 했다. 이와 같은 굴절과정은 주한미군 철수론이 되풀이되고 있는 지금도 시사하는 바 크다. “앞으로 세계 평화에 대한 가장 중대한 위협이 아시아에서 올 가능성이 있다. 이는 주로 침략정책을 추구하는 중공(中共)·북한·월맹(越盟) 등에서 오는 위협이 될 것이다. 아시아 국가들은 이 침략에 대비해 대미(對美) 의존도를 버리고 스스로 집단안보체제를 수립해야 할 것이다 …(중략)… 미국은 아시아에서 철수하지 않고 계속 우방으로 남아 적절한 경제원조를 지속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적 개입 및 군원(軍援)계획은 점차 축소될 것이다.” 인류 사상 최초로 달을 정복한 우주선 아폴로 11호에 탄 닐 암스트롱을 포함한 세 우주인이 지구로 귀환하던 1969년 7월25일. 역사적인 우주선의 귀환 장면을 태평양상의 항공모함 호네트호에서 지켜본 리처드 M 닉슨 대통령은 이날 존스턴 섬을 거쳐 미국령 괌도(島)에 도착했다.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아시아 5개국 순방을 앞둔 닉슨 대통령은 이날 밤 백악관 수행기자단과 예고에 없던 회견을 갖고 아시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길지 않은 기간 중 미국은 세 번이나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에서 싸워야 했다. 일본과의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그리고 아직도 끝이 안난 베트남전쟁.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처럼 미국의 국가적 자원을 소모시킨 지역은 일찍이 없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직접적인 출혈은 더 이상 계속돼서는 안된다.” 괌 독트린으로 명명된 닉슨의 이날 밤 발언은 `미국이 다시는 아시아 대륙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사 표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은 주한미군(지상군)의 철수 혹은 감축을 예고하는 예광탄(曳光彈)이었다. 이듬해부터는 미군 성조지(星條紙)와 외신들이 1개 사단 규모를 시작으로 주한미군의 점진적 철수를 예고하는 워싱턴 발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주한미군 철수설은 국내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1970년 7월 포터 주한 미 대사로부터 미군 1개 사단의 감축계획을 통보받은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주한미군 1개 사단의 철군을 일방적으로 운운하는 것은 한·미 상호방위조약 정신에 비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 국회 본회의에서 대미 결의문을 채택한 가운데 한국 정부는 철군이 이뤄질 경우 정일권(丁一權)국무총리 내각이 총사퇴한다는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미국의 새로운 대외정책 근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미 행정부는 이미 철군계획을 소리없이 진행하고 있었다. 1970년 10월15일 주한미군 사령부가 경기도 운천(雲川)에 있는 미 제7사단 제1여단 사령부 캠프 카이저를 폐쇄한다고 발표하는 것을 시발로 철수계획은 착착 진행됐다. 오히려 그것을 막은 것은 미국 내의 정치적 사건과 베트남의 공산화라는 변수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중도 사임한 닉슨 대통령(1969~74년 재임)의 뒤를 이은 제럴드 R 포드 대통령(1974~77년 재임)은 1975년 베트남의 공산화를 계기로 미국의 대한(對韓) 공약을 거듭 재확인하게 된다. 포드 대통령은 베트남 패망 직후인 1975년 5월 미국을 방문한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대한 공약은 변함없이 계속 지킬 것이며 주한미군은 앞으로도 계속 유지하겠다”고 다짐했다. 미 의회에서도 고립주의보다 분쟁에의 적극 개입을 지지하는 쪽이 우세했다. 그해 5월 미 하원은 주한미군 1만5500명을 포함한 해외 미군 7만 명을 감축하자는 딜럼즈(민주당 의원) 수정안을 311대95로 부결시켰다. 1975년 9월부터 미8군은 육군성의 인가를 받아 주한미군의 퀀셋 막사를 영구막사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1월 도널드 럼스펠드 신임 국방장관(현 국방장관과 같은 인물)은 “한반도에서 미 지상군을 철수시킴으로써 미국이 지난 20년간 유지해온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위협하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화당의 포드 대통령이 그해 11월 선거전에서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무명에 가까운 시골(조지아 주) 주지사였던 민주당의 지미 카터 후보에게 패배함으로써 주한미군 철수론은 다시 한번 굴절을 겪게 된다. “한국전쟁 당시 나는 잠수함 승무원으로 태평양에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끝난 지 2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한국에는 4만 명 이상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주한미군의 대부분을 단시일 안에 신중한 방법으로 철수시킬 것이다.” 카터 대통령(1977~81년 재임)은 취임과 동시에 자신이 선거기간에 내세운 주한미군 철수 공약을 이행할 계획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얼마 안 가 1977년 5월 카터 대통령의 특사인 필립 하비브 미 국무부차관·조지 브라운 미 합참의장의 방한을 계기로 한·미 간 첫 철군협의가 시작됐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7월 한·미 양국은 연례안보협의회(SCM) 공동성명을 통해 ▲1978년 말까지 미 지상군 전투병력 6000명을 철수하고 나머지 전투병력의 철수는 신중히 단계적으로 시행될 것이며 미 2사단의 본부와 2개 여단은 철수 최종단계까지 한국에 잔류하고 ▲한국 방위의 작전 효율화를 위해 미군 제1진 철수가 완료되기 전에 한미연합사령부(CFC)를 설치키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2003.03.05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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