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 ⑪최장수 주한미군사령관 스틸웰 대장

화이트보스 2009. 5. 18. 19:58

제1話 溫故知新 ⑪최장수 주한미군사령관 스틸웰 대장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1~2년 정도인데 유엔군사령관·8군사령관으로 재임기간이 가장 길었던 사령관은 리처드 G 스틸웰 대장이다. 그는 1973년 8월부터 76년 10월까지 38개월간 제15대 유엔군총사령관 겸 제16대 주란미8군사령관으로 근무했다. 스틸웰 대장은 개인적으로도 나하고 인연이 깊다.

스틸웰 대장은6·25전쟁 당시 한국군 1군단 수석 고문관으로 근무했다.그 후 52년 미3사단 15연대장으로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당시 육군대령이었던 스틸웰 고문관의 말 한마디에 한국군 사령관이 옷을 벗을 정도로 권위가 대단했다.그의 유일한 상관은 군사고문단장인 로버트 준장뿐이었다.

그때는 100% 미국 군원(軍援)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다.한국군은 인사권은 물론 주권도 없었다.그 시절 나는 까마득한(?) 아래 계급인 육군대위였기 때문에 그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당시 우리 군단장은 별명이 나폴레옹인 이형근(李亨根)장군이었다.42년 일본 육사(56기)를 졸업하고 46년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대위로 임관해 초대 사관학교장 겸 군기사령관·8사단장을 역임하고 6·25전쟁 때 제3·제1군단장을 지낸 이형근 장군은 '대한민국 군번 번'으로 유명한 군인이다.그런데 스틸웰 대령은 당시 사단장급 인사를 좌지우지했으니 연대 작전주임에 불과한 나하고의 격차는 엄청날 구밖에.

그런데 세월이 흘러 내가 한미제1군단장·합참 전력기획국장(소장)을 거쳐 제6군단장(중장)으로 근무할 때 스틸웰 대장은 주한미군사령관으로 근무했다.자신이 대령 시절 새파랗게 젊었던 대위가 어느새 3성 장군으로 진급했으니 '언제 이렇게 컸나'라고 생각했을 법도 한데 스틸웰 대장은 급한 일이 생기면 다른참모들을 제치고 나를 찾고는 했다.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기름칠한 듯 매끄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오히려 나는 그에게 껄끄러운 존재였다.우리는 한국군 전력증강사업인 율곡(栗谷)사업이나 한미연합사 창설과 같은 중차대한 사안을 두고 선의의 토론을 하며 시시비비를 맣이 가렸다.

한·미연례안보회의(SCM)를 앞두고 한국군의 무기 도입 쇼핑리스트를 작성할 때는 물론 회의 의제를 선정할 때도 토론을 벌였다.그동안은 미군이 회의 의제를 일방적으로 정했으나 나는 의제의 취사선택을 강하게 주장했다. 한번은 미국에서 개최되는 한·미SCM에 참가하기 전 미국 군원 쇼핑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거기에 잠수함 코드를 적은 적이 있다.당시 잠수함 코드가 'SS1'인가 그랬는데 어떤 까닭인지 몰라도 이 공격용 무기가 그냥 통과됐다.이렇게 해서 스틸웰 대장이 서명·승인한 쇼핑 리스트가 SCM의제로 올랐다가 나중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스틸웰 대장은 나중에 그것이 잠수함이 아니라 통신장비인 줄 알고 승인해준 것이라고 해명했다. 당시 스티웰 대장과 나는 한·미 국방장관회의의 유일한 배석자였는데 한국군이 비록 미국 군원에 의존하는 군대였지만 나는 따질것은 따졌다.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광복 제29주년 기념식에서 육영수(陸英修)여사가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계 재일동포 문세광(文世光)이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을 향해 쏜 총탄에 맞아 운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당시 나는 합참에 근무할 때인데 태릉골프장에 있다가 비보(悲報)를 들었다.

나는 그 후 열린 SCM에서 '우리 등뒤에 있는 적'인 조총련을 의제에 올렸다.미국은 외교문제를 이유로 의제에서 제외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나는 의제에서 제외하는 대신 우리가 만들어 온 조총련 관련자료를 회의록에 부록으로 붙일것을 제안해 합의를 이뤄냈다.이 처럼 스틸웰 장군과는 인간적으로 가까웠지만 그쪽은 그쪽대로 미국 정부의 지침을 받기 때문에 나와는 선의의 알력관계를 유지했다.스틸웰 장군은 휘하에 4명의 작전참모 가용장군(준장)을 두고 있었는데 주한미군작전참모 자리가 비어 있다며 내게 추천을 의뢰할 만큼 신뢰하는 관계였다.

거기에는 아마 내가 1,2차에 걸쳐 도미(渡美) 유학을 한 경험도 작용했을 것이다. 나는 51년 대위 시절과 59년 중령시절에 미 육군 보병학교·지휘참모대학을 수료했다. 그 때문에 한국에 오는 미군 장교들은 한동안 한국 실정을 파악하느라 나한테 배우고는 했다.나는 스틸웰 사령관에게 나의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 수료 동기인 잭 콜러(Jack Kohler)장군을 참모로 추천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오산 주둔 방공포사령관이었는데 동기생이어서 가끔 만나면 내게 "한국에 가족을 데려올 수 있으면 장기 근무하겠다"고 말하고는 했다.그는 카톨릭 신자여서 자녀가 많은 편이었는데 자녀들이 사춘기여서 오래 떨어져 근무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나는 스틸웰 사령관에게 그런 사정을 얘기해 가족을 데려올 수 있도록 했으며 그는 스틸웰 사령관의 작전참모가 돼 한국에서 연장 근무했다.나중에 백령도 주민들은 스틸웰 사령관을 기념하는 공적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