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話 溫故知新 (17)흑백 인종 갈등도 기지촌 정화사업 촉발 | |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1970년대 기지촌 정화운동은 어떻게 해서든 주한미군 철수를 막아보려는 동기에서 시작됐다. 주한미군에 좀 더 쾌적한 환경을 제공, 한국을 떠나려는 주한미군 수를 조금이라도 더 줄이기 위한 기지촌 정화사업의 핵심은 기지촌 여성들을 상대로 한 성병(性病) 정화였다. 그래서 기지촌 유흥업소의 성병 예방을 위한 여러 조처가 의무화됐다. 그런데 당시 자식을 군에 보낸 미국 본토의 부모들이 한국 근무를 기피하는 편지를 정부 당국과 언론사에 보낸 이유가 한국 기지촌의 높은 성병 발병률만은 아니었다. 또다른 이유는 한국 기지촌의 흑백 인종 차별이 심하다는 편견이었다. 성조기가 하강하는 시각은 기지촌의 아침이 열리는 시각이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기지촌의 아침이 열리면 거기에는 흑백을 가르는 명백한 경계선이 있었다. 미군들 스스로가 피부색에 따라 그어 놓은 선이지만 미군에 의존해 생업을 꾸려나가는 기지촌 주민들 또한 그 선에 따라 경계가 나뉘었다. 백인 병사가 다니는 술집에는 흑인 병사들의 발길이 끊기고 흑인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양복이 걸린 양복점에는 백인 병사들이 오지 않았다. 거기에는 중용(中庸)의 미덕이 적용되지 않았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고 양쪽 모두를 고객으로 삼기 위해 중용의 길을 택하는 것은 곧 모두 잃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문에 기지촌의 각종 업소는 물론 아가씨들도 흑인·백인 가운데 어느 한쪽만 택해 영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한강 이남 재배치 이야기가 나오는 미2사단 사령부가 있는 경기도 동두천시의 경우 미2사단 정문 앞을 경계로 해 북쪽인 북보산리는 흑인들이 지배하는 세계였고 남쪽의 남보산리는 백인 전용 지역이었다. 미군들이 `리틀 시카고'라고 부른 이곳은 전국 18개 기지촌 중에서도 흑백 패싸움이 가장 잦았던 곳이다. 마치 조직폭력배들이 이른바 `나와바리'(구역) 다툼을 하듯 툭하면 경계문제를 놓고 집단 난투극을 벌였다. 기지촌을 둘로 쪼개 놓은 흑백 대립은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한 68년 정점에 달했다. 흑인 병사들은 전국 기지촌 곳곳에서 백인 병사들을 두들겨패고 그들의 전용 술집을 닥치는대로 때려부쉈다. 당황한 미군 당국은 기지촌에서의 흑백 인종차별을 몰아내겠다며 모든 업소는 고객(미군)을 상대로 흑백을 구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래도 흑인 소요가 가라앉지 않자 미군 당국은 대표적 흑인 거리인 경기도 파주 용주골의 집단촌과 동두천의 북보산리 일대를 미군 출입 금지 지역으로 폐쇄해 버렸다. `미8군 당국은 정책적으로 업소의 인종차별을 금한다'는 경고 푯말을 전국의 미군 상대 클럽에 내걸게 했으며 흑인들만 드나드는 클럽에는 `오프 리미츠'(off-lim its·출입 금지) 딱지를 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 조처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와 흑인 병사들은 미군 출입을 금지하는 헌병대와 집단 충돌을 일으켰다. 71년 7월9일 밤 미군 기지 캠프 험프리가 있는 경기도 평택 안정리 일대에서 미군 병사들과 기지촌 주민들 간의 유례없는 집단 패싸움이 벌어졌다. 흑인 병사 50여 명이 기지촌의 한 클럽에 동시에 들어가 업소를 때려부수자 1000명이 넘는 한국인들은 이에 항의해 낫을 휘두르고 돌을 던졌다. 미군 헌병대와 순찰대, 그리고 한국 경찰까지 합세한 진압부대는 최루 가스·공포탄으로 진압했으나 험악한 분위기는 며칠간 계속됐다. 이와 같은 사건과 기지촌 정화운동을 계기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합동위원회가 민·군 관계 특별소위원회를 만들고 청와대는 정부 각 부처 차관이 참석하는 기지촌정화위원회를 설립했다. 두 위원회의 설립 목적은 미군에 쾌적하고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군 관계 특별소위원회는 인종차별을 하지 않도록 클럽 여성들을 교육하라고 기지촌이 있는 지방자치단체에 지침을 내렸고, 기지촌정화위원회는 클럽 여성에게 보건증을 달게 하고 정기적으로 산부인과 검진을 받게 하는 등 성병 예방에 만전을 기했다. 또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문제는 SOFA 합동위원회 특별소위원회의 단골 주제가 됐다. 이 자리에서 한국 정부 대표자와 미군 대표자는 성병 예방의 책임을 둘러싸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둥 서로 불만을 쏟아내고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 60년대 말까지 정부는 미군 기지촌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미군 측에서 지속적으로 미군의 높은 성병 감염률을 우려하며 기지촌에 대한 국가적 정책을 펼 것을 요구했지만 자존심이 강한 박정희 대통령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또 성매매를 금지하는 윤락행위방지법을 제정, 윤락을 금해온 정부가 미군의 쾌적한 환경을 위해 기지촌 정화운동을 펼치는 것은 이율배반이었다. 그러나 주한미군 철수라는 안보 불안 요인은 박대통령의 자존심마저 굽히게 한 셈이다. 2003.04.02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 dangkim@empa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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