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話 溫故知新 (16)주한미군 철수가 촉발한 기지촌 정화운동 | |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1969년 닉슨 독트린이 공표된 이후 주한미군 감축이 실제로 추진되자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을 비롯한 정부·군 관계자들은 주한미군 철수를 막을 묘안을 짜는 데 골몰했다. 60년대 말까지 약 6만2000명이었던 미군은 71년 보병 제7사단이 철수해 4만5000여 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그런 가운데 박대통령이 한미 제1군단사령부를 순시했을 때 당시 부사령관이었던 나는 박대통령을 수행하면서 미군 기지 주변 정화(淨化)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70년대 한국 정부가 지원하는 대대적인 `기지촌 정화운동'으로 발전한 이 미군 기지촌 정화라는 아이디어를 내게 처음 제공한 이는 한미 제1군단 초대 사령관 에드워드 L 로우니 중장이었다. 하루는 로우니 군단장이 내 사무실에 찾아와 환담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장군, 한국 정부가 주한미군 철수를 원하지 않지만 미군은 지원병제도를 택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국방정책에서 여론이 중요하다. 그런데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한국이 아닌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는 편지를 정부 당국이나 언론사에 보내고 있다. 이유는 한국이 성병 발병률이 높고 흑백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여론이 정책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국민은 미군 주둔을 원하고 있지만 미국 장병이나 부모들이 한국 근무를 기피하게 되면 한국에 배치될 인원이 그만큼 줄어든다.” 그러면서 로우니 장군은 자신이 독일(당시 서독) 주둔 미군 사단장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에 온 점을 상기하며 “이곳에 와 보니 미군이 근무를 마치고 쾌적한 환경에서 쉴 수 있도록 기지촌을 정화할 필요성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는 그때만 해도 미군 기지촌에 대해 무관심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박대통령이 한미 제1군단을 순시할 때 기지촌 정화 필요성을 건의했던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박대통령께 건의할 `적절한 기회'를 엿보다가 박대통령이 부대순시를 마치고 헬기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보고했다. 나는 “기지촌 문제가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면서 로우니 사령관이 한 이야기와 함께 기지촌 정화가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박대통령은 그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박대통령은 시동을 걸어놓은 대통령 전용 헬기에 한 발을 걸쳐 놓은 채 내 건의를 경청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박대통령은 당시 정종택(鄭宗澤)청와대 정무비서관(그후 농수산부장관 역임)을 한미 제1군단 지역에 보내 실태조사를 하게 했다. 건의 내용과 실태조사 결과는 당연히 일치했다. 나는 이 일을 계기로 군단장을 수행, 미군 의무·헌병 참모들과 함께 의정부 시내 기지촌 실태 파악을 위한 순시를 한 적이 있다. 기지촌이 아무리 동맹관계를 위한 `필요악'이라고 하지만 나는 한국군 장군으로서 우리나라 여성이 미군을 상대로 그런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미군들을 상대로 이른바 `쇼트타임' 영업을 하는 윤락가는 위생상태가 엉망이었다. 로우니 사령관은 기지촌 순시 때 “서독의 미군 기지 주변에도 이런 영업시설이 많지만 호텔 수준으로 쾌적하고 위생적이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따라서 주한미군보다 주독미군의 성병 이환율(罹患率)이 낮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미군 기지 18곳에 기지촌이 형성돼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비참한 현실을 드러낸 것이지만 이른바 기지촌 정화사업은 로우니 한미 제1군단 사령관의 아이디어와 내 건의가 도화선이 돼 시작된 것이다. 71년께 어느 날 청와대에서 대책회의가 있으니 와달라는 전갈이 왔다. 정부 각 부처 차관들이 대표로 참석하는 `기지촌 정화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71년부터 76년까지 기지촌 정화위원회에서 추진한 정화사업은 박대통령이 직접 종합보고를 받고 점검할 만큼 관심이 컸다. 70년대 당시 주한미군 철수를 억제하는 것은 국가 안보가 걸린 국책사업으로서의 중요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당시 내 기억으로는 미군 기지촌 18개 지역을 대상으로 전국적으로 추진된 정화사업의 사업비만 수십억 원이 책정됐다. 사업의 골자는 기지촌 윤락가의 다 무너져 가는 비위생적인 가옥을 걷어내 말끔한 새 건물을 짓고 민간 사업자들에게 호텔 관광사업 허가를 내주고 금융지원을 해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지촌 이전이나 폐쇄와는 무관한 일종의 현대화 작업이었기 때문에 기지촌 주민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았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기지촌에 새마을운동을 적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본디 기지촌 주민을 위해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주한미군에 좀 더 쾌적한 환경을 제공, 한국을 떠나는 주한미군 수를 조금이라도 더 줄이기 위한 방책이었다. 2003.03.31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 dangkim@empa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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