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 (20)철책선 설치 비화 -下-

화이트보스 2009. 5. 18. 20:01

제1話 溫故知新 (20)철책선 설치 비화 -下-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철책선(鐵柵線) 설치를 반대한 이병형(李秉衡) 육본 작전참모부장의 논리는 이런 것이었다.

“정규군이 은신, 잠복근무하다가 적이 침투해 오면 사살하거나 생포해야지 어찌 울타리를 쳐 놓고 침투를 막으려 하느냐. 그런 식으로 하다가는 군인들이 약해져 쓸모가 없게 된다. 훈련된 부대는 야간에 적이 오면 지근(至近)거리까지 유인, 포획하거나 사살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옳은 말씀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의 훈련 정도·부대 배치가 그럴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1인당 GNP(국민총생산)는 수백 달러에 불과해 공사에 필요한 쇠고리 철망·철주·철조망 같은 물자는 거의 미군 물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나는 당시 찰스 H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미8군사령관과 하프먼(Haffman) 미8군 작전참모를 만나 설득했다.

한국군 상층부는 이 공사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는 분이 많았던 데 비해 물자지원을 떠맡게 된 미군 당국이 오히려 이해를 빨리 해준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본스틸 사령관과 하프먼 장군을 설득하는 데는 채 20분도 안 걸렸다. 나는 이들에게 한글로 작성한 약도를 보여주고 군사적 측면을 강조하며 이렇게 설득했다.

“외딴곳에 두 채의 집이 있는데 한 채는 아무 울타리도 없고 다른 한 채는 엉성하지만 울타리가 있을 경우 도적이 어느 쪽을 목표로 택하겠느냐. 울타리가 있다고 해서 적의 침투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거부는 가능하다. 그런 까닭에 전(全) 전선에 펜스를 치려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동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한 것보다 난공사였다. 특히 물자 운반을 위해 헬리콥터까지 지원했지만 험준한 산악지대에서는 더욱 힘들었다. 이 공사를 착수하기 전에 각 사단·군단의 작전참모와 공병 관계자들을 소집, 전방의 일정한 장소에서 공사 개념·시공 방법 등을 교육·시범을 통해 자세히 설명했는 데도 부대에 따라 엉뚱한 곳에 시공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차례 수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위치에 철책선이 서게 된 것이다.

철책선을 볼 때마다 나를 가슴 아프게 한 사연도 함께 떠오른다. 당시 12사단에 근무하며 철책선 설치작업을 하던 모 육군 중위가 “누가 이러한 계획을 세웠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아도 비무장지대(DMZ)로 나라가 분단된 것이 가슴 아픈 데 나는 양심상 여기에 철책을 치는 작업에 종사할 수 없어 떠나갑니다”라는 내용의 편지 1통을 써놓고 월북한 사건이 그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병은 건봉산 지역의 1100고지에서 무더위를 참으며 묵묵히 철책 설치작업을 했다. 아무 경험이 없는 병사들도 이 공사를 끝낼 무렵에는 모두 일류 용접공·철재공이 돼 있었다.

당초 설치할 때는 이 장애물의 수명을 10년 정도로 보았다. 그런데 30년 이상 세월이 흘렀는 데도 아직까지 그 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론 그동안 보수·유지를 철저히 해왔고, 또 국력의 신장과 더불어 우리 자체 물자를 갖고 복수(複數)로 철책선을 설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당시 어려운 결심을 한 서종철(徐鐘喆)1군사령관, 물자지원을 아끼지 않은 본스틸 미8군 사령관의 공로는 길이 기억돼야 하고 선배의 자리를 물려받아 철책선을 지키고 있는 현역 장병들은 피땀을 흘려 시공하고 물러간 전임자들의 노고에 보답하는 뜻에서 조그마한 틈도 없도록 최선을 다해 전선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철책 자체가 적을 막아주지는 않는다. 철책을 지키는 경계병이 자리를 비우거나 졸아서 공비가 침투한 예는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968년 1월21일 미군 담당지역이기는 했지만 31명이나 되는 인원, 즉 김신조(金新朝)를 포함한 소위 북한 124군부대원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유유히 서울 시내까지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잊을 수 없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124군부대원 31명이 철책선을 넘어온 그해 1월7일 연초의 치안안보회의 때는 전방에 설치한 철책과 똑같은 모양의 철책 샘플을 박정희(朴正熙)대통령에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철책은 뚫렸다. 나중에 어느 사단이 경계하는 구역의 철책이 뚫렸는지를 점검했으나 한결같이 자기들 사단은 이상이 없다는 보고만 올라왔다. 그래서 나는 침투한 124군부대원 중 유일한 생포자인 김신조를 앞세워 현장검증을 했다.

김신조는 거리낌없이 미2사단이 관리하는 구역의 철책 앞으로 다가갔다. 외관으로는 전혀 뚫린 흔적이 없었다. 그런데 김신조가 한군데를 발로 차니 뻥 하고 뚫리는 것이었다. 이들은 L자형으로 철조망을 끊고 들어와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다시 묶어놓고 갔던 것이다. 그러니 미군도 철책을 점검했지만 몰랐던 것이다. 어쨌든 미군은 할말이 없게 됐다.

2003.04.16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 dangkim@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