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 (22)향토예비군 창설

화이트보스 2009. 5. 18. 20:02

제1話 溫故知新 (22)향토예비군 창설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서랍 속에 잠자던 향군(鄕軍) 설치안이 햇빛을 보게 된 것은 1968년 1월 잇따라 터진 1·21사태·푸에블로호 피랍 사건이었다. 일련의 안보위기 사건이 잇따라 터지자 2월7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경전선 철도 개통식 치사를 통해 “북괴 도발에 대비하기 위해 250만 재향군인을 무장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한때 괄시받던 연구안이 골격이 돼 오늘날과 같은 `내 고장과 내 직장을 내 힘으로 지킨다'는 개념의 거창한 향토예비군이 된 것이다.

향토예비군 창설 당시 나는 1군사령부 작전참모였다. 나는 재향군인을 무장시키겠다는 박대통령의 다짐을 듣고 육군본부에 전화했다. 당시는 1·21사태를 계기로 전방 경계를 강화하면서 필연적으로 야기된 후방경계의 공백이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육본에 “박경석 중령을 찾아 내가 육본 작전처장으로 있을 때 그에게 연구를 맡긴 향군 설치안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것을 참고해 창설하라”고 조언했다.

그런 준비가 있었기에 군은 1·21사태 이후 두 달여 만인 68년 4월 당시 문형태(文亨泰) 2군사령관(육사2기·대장 예편)의 편성 책임 아래 향토예비군 창설식이 거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그런 준비가 있었기에 예비군은 창설한 지 겨우 두 달여 만인 68년 6월 처음으로 대간첩작전에 투입돼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첫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사실 창설 초기 단계의 예비군은 조직·제도, 그리고 무장에서 보잘것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비군은 그해 6월24일 강원도 고성군에 출현한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처음 참전, 도주로를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 그해 7월에는 허사도에 침투한 무장간첩 소탕작전에 참전, 군경 합동작전으로 침투간첩 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둠으로써 예비군 창설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후 나는 육본 작전처장 근무 당시 예비군 창설 과제를 맡긴 박경석(朴慶錫)중령(육사생도2기·준장 예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참모님의 형안(炯眼)에 다시금 존경을 표합니다”라고 돼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예비군 창설의 위용을 국민에게 각인한 것은 그해 11월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소탕작전에서 거둔 혁혁한 전과였다. 당시 예비군은 군경과 함께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한 무장간첩 120명을 소탕하는 합동작전을 벌였는데 그중 약 7할의 공비를 예비군이 생포 또는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울진·삼척 대간첩작전은 우리 군에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남겼지만 분명한 것은 이때 만약 예비군이 없었더라면 이처럼 단기간에 이들을 소탕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향토예비군은 공비들이 침투한 곳의 지형, 즉 산간벽지의 숨을 만한 곳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분산된 공비들을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제1군 작전참모로 있던(나의 담당 책임 지역은 아니지만) 나는 필경 공비들이 북상 도주할 것으로 판단, 정확한 상황을 파악·대비하기 위해 현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말이 예비군이지 `개구리복'이라고 부르는 제복도 없어 농투성이·산골 사람 옷차림에 피아(彼我) 식별을 위해 `예비군'이라는 완장을 차고 무장은 카빈총 또는 M1 소총에 실탄 10여 발, 그리고 신발은 고무신에 새끼줄로 동여맨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조차 한 빈약한 상태의 그들이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향토 방위의 책임을 다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대견하기 그지없다. 그런 모습이면서도 대간첩작전에 참전한 예비군들에게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좋겠느냐”고 물었을 때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수류탄이나 더 달라”고 답변한 어느 예비군의 음성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이러한 예비군들이 있었기에 창설 첫해만도 5회에 걸친 대간첩작전에 89만 명이 투입돼 무장간첩 19명을 사살하고 5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국방일보 4월5일자에 따르면 창설 첫해의 이러한 전과를 비롯, 예비군이 지금까지 35년간 대간첩 소탕작전에 참전한 횟수는 무려 89회로 연인원 450만여 명의 예비군이 조국을 지키는 현장에 투입돼 사살 85명·생포 14명이라는 자랑할 만한 전과를 올렸다.

또한 빈약하기 짝이 없던 초창기 모습에 비하면 이제는 국산 중장비로 무장한 전투예비군 부대로 발전을 거듭, 일단 유사시에는 현역군의 확장에 즉각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됐다. 그런 점에서 일부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인 제도 개선의 여지는 있을지언정 향토방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비군이 든든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2003.04.23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 dangkim@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