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 (23)1·21사태 교훈

화이트보스 2009. 5. 18. 20:02

제1話 溫故知新 (23)1·21사태 교훈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1968년 1월21일 오후 10시쯤 북한에서 남파한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까지 침입한 사건을 두고 우리는 1·21사태라 부른다. 김신조(金新朝)를 포함한 소위 북한 124군부대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유유히 서울 시내까지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군에 많은 교훈을 남겼다.

앞에서 얘기했지만 우선 철책 자체가 적을 막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해 1월7일 연초의 치안안보회의 때는 전방에 설치한 철책과 똑같은 모양의 철책 샘플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앞에서 보였다. 폭·높이가 각 3야드, 땅속 깊이 역시 3야드이고 위에 실패 모양의 윤형(輪形) 철조망을 설치한 철책 샘플 시연(試演)을 하면서 나는 “이렇게 막아도 적은 반드시 철책을 뚫을 방책을 강구할 것이므로 철책이 적을 막아주지는 못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적은 그로부터 보름도 채 안돼 철책을 뚫고 내려왔다.

61년 5·16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국민소득이 90달러도 안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62년부터 시작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기간산업이 자리잡고 수출을 막 시작하는 등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당시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전투사단을 파병했다. 이런 배경 하에서 당시 초조해진 북한의 김일성은 남쪽의 국력 신장에 제동을 걸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해 이른바 4대 군사노선을 확정, 그 일환으로 특수부대인 124군부대를 침투시킨 것이다.

나는 당시 1군 작전참모로서 야반에 상황장교로부터 제25사단 지역에 소대 규모의 적이 침투해왔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윤봉주(尹鳳柱·육사7특·소장 예편)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내용인즉 관내의 우(禹)씨 4형제가 산에 나무하러 가서 이들에게 잡혀 있다가 돌아와 경찰지서에 신고해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단장에게 이에 대한 조치를 물어보니 서울에 이르는 침투로가 될 만한 곳에 병력을 배치했다는 것이다. 나는 사단장에게 적의 기동속도를 고려해 그보다 배(倍)가 되는 선에 배치할 것을 권고했으나 그날 밤은 접촉이 이뤄지지 않은 채 날이 샜다.

내가 이 제보 내용의 정보 가치가 A등급에 해당할 만큼 신빙성이 크다고 판단한 것은 신고자가 단독이 아닌 우씨 4형제라는 점과 그중에는 제대군인도 포함돼 있다는 점이었다. 또 67년 육군본부가 발행한 정기 `정보보고서' 가운데 적은 후방 침투를 위해 열성 당원·복역수들로 결사대를 조직, 특수부대를 편성해 초인적인 강훈련을 시키고 있다는 내용을 본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1·21사태를 계기로 지휘관은 군정보 당국이 펴내는 정보보고서를 반드시 정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당시 생포한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의 진술을 들어보면 세검정에 다다르기 전에 검문을 받았으나 특수기관에 소속된 부대(방첩대)라며 훈련 복귀 중이라니까 무사 통과시키더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대 규모의 적이 침투했는데도 서로 자기 지역이 아니라는 점만 주장하고 그 흔적을 발견하지 못해 종래에는 김신조를 현장에 데리고 가서야 미군 사단 책임지역의 철책을 뚫고 침투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이 지역은 미 제1군단(집단) 작전통제 구역으로 한국군 사단들이지만 야전군의 참모가 왕래하는 것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을 염려한 나머지 군사령관이 방문조차 만류하는 것을 무릅쓰고 나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 까닭은 미군 지휘관은 국내에서의 비정규전쯤은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거니와 정부나 일반 국민이 생각할 때 야전군이 전담하고 있는 줄 알고 그 결과만을 갖고 평가할 것이 뻔하고, 무엇보다 일단 침투해온 적을 가장 신속한 방법으로 소탕한다는 것은 책임 소재를 떠나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날이 밝자 먼저 25사단을 방문, 상황과 조처를 들은 다음 그 길로 미1군단 사령부에 들러 방문 목적과 관심을 표시한 후 `팩트 파인딩'(fact finding)을 위한 협조를 구했다. 우리 군의 작전부대는 적의 침투 경로로 판단되는 경기도 파주군과 고양군 노고산 일대를 수색했으나 적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적들은 이미 서울 자하문을 거쳐 청운동 쪽으로 침입하려다가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 심문에 걸리자 기관단총을 난사, 경찰관 1명·민간인 5명을 사살하고 경찰관 2명·민간인 1명에게 총상을 입혔다.

이들은 4대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승객을 살상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날 밤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총경(경무관 추서)은 흉탄을 맞고 순직했다. 반면 현장에서 무장공비 5명이 사살됐으며 이날 밤 생포된 1명은 치안국 복도에서 자폭했다.

3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마 이때 우씨 형제들의 제보와 포병 장교 출신인 최규식 서장의 교전과 순직(殉職)이 없었다면 김신조 일당은 성공적으로 청와대를 습격, 국가원수의 `멱을 따는'(김신조의 진술)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유유히 북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2003.04.28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 dangkim@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