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話 溫故知新 (24)“박정희의 `멱'을 따러 왔수다” | |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박정희의 `멱'을 따러 왔수다.” 침투한 북한의 124군 부대원 중 유일한 생포자인 김신조(金新朝)는 수갑을 찬 채 텔레비전 방송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김신조의 충격적 발언이 전국에 생생히 중계되자 국가원수를 시해(弑害)하려는 불경스러운 발언을 거르지 않고 내보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국민의 반공·안보의식을 고취하는 데 그만큼 생생한 시청각교육 효과도 없었다. 우리는 생포한 김신조의 진술을 통해 이들의 남파 목적이 청와대를 습격, 요인을 살해하려는 것이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돼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적개심에 불탄 국민은 무장간첩 소탕작전이 전개 중인 1월31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한 `북한 만행 규탄대회'를 필두로 전국적으로 규탄대회를 열었다. 휴전 후 10여 년이 흘러 안보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이 다소 희박해져 가던 터에 터진 1·21사태와 김신조의 발언은 안보의식에 일대 경종을 울림으로써 결과적으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가 됐다. 이것을 계기로 그해 2월11일 처음으로 한·미 국방장관회담의 정례화를 위한 한·미 고위회담이 열리고 한국의 안전보장을 위한 한·미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이후 한·미 국방장관회담은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로 바뀌어 지금까지 한·미 안보동맹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틀로 존속되고 있다. 또 이를 계기로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운다'는 250만 향토예비군을 창설할 수 있게 됐다. 김신조는 방첩대에서 신문을 받았는 데 당시 방첩대장은 나와 사관학교 동기이자 내 결혼식 들러리를 섰던 윤필용(尹必鏞)준장(육사8기·소장 예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윤필용 장군은 방첩대장 당시 위세가 대단했다. 또 그가 군의 진급·승진을 좌우한다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나돌았다. 그러나 윤필용 장군은 당시 김신조의 발언을 여과없이 내보냄으로써 비판을 받아야 했다. 1·21사태 당시에도 상황 발생 초기에 윤봉주(尹鳳柱)25사단장(육사7특·소장 예편)에게 차단병력의 증가 배치를 요청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특수훈련을 받은 이들은 이미 아군의 차단선을 벗어날 만큼 빠른 속도로 행군했다. 또 이들은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았으나 “방첩대인데 전방훈련 갔다가 복귀하는 중”이라고 말하자 프리 패스였다. 그만큼 방첩부대의 세도가 셀 때였고 이는 권력기관일수록 월권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안겨주었다. 또한 당시 전방에서는 사단 편제였지만 후방지역에서는 미국식 관구제(管區制·area commander)를 편성했을 때인데 관구에는 전투병력이 거의 없었다. 당시 관구는 준장이 지휘했는데 후방지역은 1관구(광주)부터 6관구(서울)까지 5개 관구(4관구는 없음)로 편제돼 있었다. 그 뒤 전두환(全斗煥) 정부는 관구를 사단으로 증편했다. 6관구는 나중에 수도군단으로 통합, 수방사령부로 발전했는데 1·21사태 당시 침투지역을 관할한 6관구 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사 동기인 김재규(金載圭) 장군이었다. 6·25전쟁 전에 군 축구선수로 활약한 김재규 장군은 성격이 급해 싸우다가 사람이 죽는 바람에 군에서 옷을 벗었으나 전쟁이 나자 다시 군에 복귀한 전력이 있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내 동기생 윤필용 방첩대장과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박대통령의 동기생 김재규 6관구 사령관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 “무장공비들이 은신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 송추 일대의 주요 간선도로에 서울 시내 모든 차량을 동원, 밤새 라이트를 켜 감시하면 도로를 건너뛰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일단 밤에는 더 이상 침투하지 못할 것이므로 낮에 여유를 갖고 토벌작전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군은 2월3일까지 계속된 소탕작전 기간 중 제1사단의 이익수(李益洙)연대장(예현2기·준장 추서)을 비롯한 상당수 장병의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리고 육군은 고도로 훈련된 적의 특수부대를 맞아 이를 소탕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우선 서울 근교에서 벌어진 상황 탓도 있었지만 상급기관에서 너무 많은 방문자가 밀려와 현지 작전지휘관은 지휘보다 이들을 영접하고 상황을 설명하는 데 시간과 정력을 빼앗겼다. 또 장병들은 비정규전에 익숙지 않아 불과 30여 명의 적을, 그것도 우군지역 내에서 소탕하는 데 1만 발이 넘는 막대한 양의 실탄을 소모했다. 그리고 야간에 불을 피운 탓에 아군의 배치현황이 적에게 노출되는 폐단이 나타나기도 했다. 2003.04.30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 dangkim@empa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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