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 (26)침투로만 있는 124군부대 지도

화이트보스 2009. 5. 18. 20:03

제1話 溫故知新 (26)침투로만 있는 124군부대 지도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1·21사태 당시 아군의 작전은 30여 명의 `독 안에 든 쥐'를 잡는 데 2000여 명의 장병을 지휘하는 연대장이 희생되고 그중 일부는 놓친 실패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처지에서 보면 그 작전은 더더욱 실패한 작전이었다. 1군 작전참모인 나는 작전을 종결하기 전에 사살된 124군 부대원들의 시신을 당시 송추초등학교 운동장에 늘어놓고 유일한 생포자인 김신조를 데리고 가서 신원을 확인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16절지에 이름을 써서 운동장에 늘어놓은 시신 위에 올려놓고 확인 대조작업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신조는 처음에는 `전우'들의 시신을 단 한 명도 알아보지 못했다. 총격으로 인해 훼손된 탓도 있지만 시신이 얼고 경직돼 누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잔뜩 얼어 있던 김신조도 날씨가 풀리면서 긴장이 풀린 듯 `전우'들의 시신에 익숙해져 하나하나 신원을 확인해 나갈 수 있었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3명은 도주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이들의 리더로 추정되는 시신에서 가위로 잘라 둘둘 만 군사지도가 나왔다. 그 지도는 청와대까지 남북으로 길게 침투 경로만 나타나 있고 그것을 벗어난 `좌우'는 `필요 없는 것'으로 절단돼 있었다. 말하자면 침투로만 있고 도피로는 막아버린 일종의 `막다른 지도'인 셈이다.

이들은 또한 고도로 훈련받은 특수부대원들이지만 그들의 체제상 약점을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휘체제가 한번 와해되자 전혀 갈피를 못잡고 방향감각을 잃어 심지어 송추에 있다가 포천지역에 나타나기까지 했다. 이리저리 도망쳤지만 좌우로 분산해서 도주할 지도가 없다보니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좌충우돌할 뿐이었다.

또 이들은 리더가 함께 침투한 31명 중의 동료였기 때문에 지휘권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노고산 일대에서 우씨 형제와 맞닥뜨렸을 때 일부는 죽이자고 한 반면 일부는 살려주자고 해 갑론을박할 뿐 통일된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씨 형제가 지서에 신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이들이 북에서 훈련받을 때 `남한은 이미 공산주의 사상이 상당히 전파되어 내려가기만 하면 열렬한 환영을 받을 것'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입력됐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사례는 공산주의체제의 가장 큰 약점인 획일성과 맹목적인 복종이 인민군의 운용에도 그대로 강요되고 있다는 것을 노정(露呈)시킨 대표적인 본보기였다. 실제로 그해 11월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산간 고립부락에서 공공연히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입당 권유 연설을 하는 만용(蠻勇)을 부리기까지 했다.

그 뒤 귀순한 김신조는 내가 1군 작전참모로 있을 때 안보 강연을 하러 왔다가 내 방에서 단둘이 대화한 적이 있었다. 동물처럼 쫓기다가 잡힌 직후의 모습과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고민이 있으면 이야기해보라고 했더니 그는 두 가지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나는 자신의 발언이 생방송으로 전국에 방영돼 어디에 가든 사람들이 알아보고 에워싸는 통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자수가 아니라 잡혔기 때문에 자신의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언제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나는 유명세는 오직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생명의 위협에 대해서는 “내 인격을 걸고 장담하건대 너 하나 죽여 대한민국이 얻을 게 뭐가 있겠느냐”며 “대한민국은 그렇게 옹졸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가 나중에 목사가 된 데는 그런 불안감도 작용했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2003.05.07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 dangkim@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