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 (27)美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화이트보스 2009. 5. 18. 20:04

제1話 溫故知新 (27)美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북한의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사태의 충격이 한반도를 강타한 1월23일 낮 12시쯤. 동해상의 원산 앞바다에 떠 있던 미군의 최신예 첩보수집함 푸에블로호 함장 로이드 M 부커 중령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엄동의 한파가 몰아치는 함교(艦橋)로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전날 푸에블로호 주위를 돌다가 사라진 두 척의 어선이 마음에 걸렸는데, 북한 구잠함(驅潛艦) 한 척이 접근해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커 함장으로서는 `보잘것없는 북한 해군이 설마 막강한 미 해군에 감히 도전하겠나'하는 생각이 앞선 나머지 으레 있는 감시 임무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오산이었다. 몇 분 뒤에 북한 초계정(哨戒艇) 한 척이 가세하더니 국제신호로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해 왔다.

곧 이어 미그기 두 대가 나타나 위협비행을 했으며 함정 수도 구잠함 두 척, 초계정 네 척으로 늘어났다. 부커 함장은 그때서야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는 곧 무전사에게 일본 요코스카(橫須賀) 기지로 SOS를 타전토록 하고 북한 선박들로부터 탈출을 시도했다. 순간 북한군 구잠함의 포문이 불을 뿜었고 푸에블로호의 레이더와 통신·항해 마스트가 떨어져 나갔다. 당황한 부커 함장은 순간 교전을 생각했지만 첩보함인 푸에블로호에는 50㎜ 경기관포 2문·경기관총 10정, 그리고 약간의 수류탄밖에 없었다. 함정에는 극비문서들과 전자수신 장치가 설비돼 있었다.

부커 함장은 배를 침몰시킬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함에는 장교 6명·병사 75명과 두 명의 민간인 과학자가 승선해 있었다. 영하의 겨울바다에서 침몰은 입수즉(入水卽)동사(凍死)를 의미했다. 부커 함장은 결국 부하들에게 정선(停船)을 명했다.

북한 함정은 푸에블로호의 함수(艦首)와 함미(艦尾)를 둘러싸고 `우리를 따르라'고 신호했다. 절망한 부커 함장은 급한대로 최신 전자장치를 파괴하고 기밀문서를 소각하라고 지시했다. 다리에 총상을 입은 부커 함장은 부축을 받으며 무전실로 들어가 요코스카 미 해군기지 사령부를 불러 교신했다.

“원산으로 끌려가고 있다. 세 명 부상, 한 명은 다리가 날아갔다. 비밀문서와 되도록 많은 전자장치를 파괴하고 있다. 저항할 생각은 없다.”(부커 함장)

“공군기가 구조하러 간다. 주한미군과 협의해 F-105기를 보낼 것이다. 이는 비공식적인 것이지만 우리 생각으로는 꼭 갈 것으로 보인다. 적의 비행기 수를 세어 보라.”(주일 미 해군기지)

푸에블로호는 끌려가면서 계속 급보(急報)로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꼭 갈 것이라던 구원의 손길은 오지 않았다. 초조해진 부커 함장은 백악관과 이어지는 초긴급 메시지까지 타전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날 오후 2시32분쯤 푸에블로호는 `무전을 끊는다'는 마지막 전문을 보냈다. 5대양을 지배하는 초강대국 미국의 최신예 해군 정보함이 북한 해군에 피랍(被拉)되는 수모를 겪는 순간이었다.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은 6·25전쟁 이후 발생한 최초의 해상 납치 사건이었다. 더욱이 미국 함정이 적에 나포(拿捕)되기는 남북전쟁 이후 106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북한의 124군 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사태가 일어난 지 불과 이틀 후에 발생했다는 점이다.

피랍 다음날인 1월24일 오후 2시 존슨 미 대통령은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했다. 그 다음날 존슨 대통령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래 처음으로 공군 및 해군 항공대 예비역 동원령을 내리고 전투기·수송기에 출동태세를 갖추라고 명령했다.
1·21사태와 함께 온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은 바야흐로 한반도를 6·25전쟁 이후 최대의 긴장상태로 몰아넣었다.

2003.05.10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 dangkim@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