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 (29)박정희의 `이유 있는 분노와 충격'

화이트보스 2009. 5. 18. 20:05

제1話 溫故知新 (29)박정희의 `이유 있는 분노와 충격'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평양 폭격 등 군사적 보복 방안을 강구해 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는 개인적 분노에 따른 무모한 지시였다. 그러나 그 분노만큼은 `이유 있는 분노'였다.

한국 내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1968년 2월 한 달 동안만도 아홉 번이나 북한 측과 비밀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한국 정부는 판문점에서 진행된 이 비밀협상의 사전·사후에 대해 미국 측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그것은 사실 협의라기보다 통고였다. 한국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한국 정부는 처음부터 미국·북한의 협상 자체를 반대했다.

그러나 자국민을 구하겠다는 미국 측의 요청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은 북한과의 비밀협상을 양해하는 대신 `한국 안에서 한국의 관여 없이 적인 북한과 비밀회담을 연 것은 주권을 무시한 처사'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협상에서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사건을 동등한 비중으로 다룰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비밀협상에서 1·21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제쳐놓은 채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에만 집착했던 것이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을 배제한 미·북 직접협상은 우리 국민에게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2월에 시작된 비밀협상은 9월이 돼도 푸에블로호가 북한 해역을 침범한 사실 인정 및 사과를 요구한 북한 측과 먼저 승무원의 제3국 이송을 요구한 미국 측의 팽팽한 대립으로 난항을 거듭했다. 비밀회담이 길어지면 각종 소문이 무성하게 마련이다. “미국 측이 중대한 양보를 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북한이 주한미군의 감축 내지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자 미국에 대한 한국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12월이 되자 미국 측은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의 연내 석방을 위한 미 정부의 결심과 협상조건' 등을 한국 측에 알리고 협조와 양해를 구했다. 마침내 12월22일 열린 제28차 비밀회담에서 미국과 북한은 승무원 석방에 합의, 다음날인 12월23일 부커 함장을 비롯한 승무원 82명과 시신 1구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남으로 돌아왔다. 피랍된 지 11개월 만이었다. 그러나 군사정전위 유엔군 수석대표 우드워드 소장이 미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서명한 석방 서명문 내용은 차라리 항복문서에 가까운 것이었다.

서명문은 소위 `북한 영해'를 두 번이나 언급하면서 침범 인정 및 사과·재발 방지를 약속함으로써 `한반도와 그 영해를 한국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 한국의 헌법에 정면 배치되는 결과까지 낳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국가 지도자와 국민에게 국익에 대한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새삼 직시하게 해주었다. 물론 미국은 이후 자국의 손상된 체면과 한국의 입장을 감안, 공식적으로 이 석방 서명문이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시말(始末)은 자국민의 이익에 대한 미국의 대처 방식과 관련해 우리의 자세에 경종(警鐘)을 울렸다.

북한은 이른바 `4대 군사노선'을 추구하는 가운데 68년 벽두부터 1·21사태에 이어 그해 11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을 일으키는 등 군사모험주의를 연속적으로 감행했다. 그런데 당시 주한미군 감축·철수로 상징되는 미국의 대(對)아시아 정책의 변화라는 지각변동 과정에서 드러난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에서 보인 미국의 차별적 대응은 박대통령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충격을 주었다.

나중 이 지면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율곡(栗谷)사업' 편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와 같은 시대 흐름 속에서 터진 일련의 안보사건은 박대통령에게 “더는 미국을 믿을 수 없다”는 불신과 함께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절감케 함으로써 한국군 전력증강사업을 착수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2003.05.14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 dangkim@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