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 (31)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화이트보스 2009. 5. 18. 20:06

제1話 溫故知新 (31)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북한은 1968년 이른바 1·21사태를 통해 대한민국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고 질서를 파괴할 목적으로 특별히 훈련받은 124군 부대원 30여 명을 청와대 부근까지 침투시켰으나 이 무모한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북한은 그 이후에도 같은 해 11월2일 해안선을 통해 124군 부대원들을 해상 침투시켰다. 그것이 바로 세칭 울진·삼척사태다.

울진 부근의 해안가 바위에는 여러 해에 걸쳐 쌓인 물새 배설물이 많은데 밤에는 이것이 발광(發光)해 멀리서도 식별할 수 있었다. 북한군은 바로 이 물새 배설물이 쌓인 바위를 표적으로 삼아 무려 네 차례에 걸쳐 30명씩 도합 120명을 특수정에 태워 상륙시켰다. 이들은 마침 해안초소 근무자(분대장)가 동네 혼인잔치에 초청받아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해 상륙했다. 따라서 해안초소에서는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산간오지로 들어간 적은 다음날 대낮에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곧 남한이 적화될 터이니 모두 노동당에 가입하라”고 권고하며 입당원서를 돌리는 식으로 무모한 짓을 했다. 따라서 이를 수상히 여긴 주민의 신고가 없었던들 아마도 이들은 부근 도시에 내려와 더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

당시 나는 제1야전군 작전참모였는데 처음에는 몇 명이 상륙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작전이 시작됐다. 지금은 군 현대화 계획의 시행으로 육군 항공에 헬기가 많아 고도의 기동성을 확보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공군에는 겨우 다섯 대의 병력 수송용 헬기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를 이용, 마찬가지로 당시 하나뿐인 제1공수 특전단 요원을 공중투입해 적을 분산시키는 전술로 작전을 시작했다.

내가 헬기를 동원한 공중강습 작전을 고려한 배경은 육본 작전처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공수특전부대 최초 편성에 관여해 그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공수특전부대는 비밀부대라고 해 미군도 우리 측에 외부에 공개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헬기를 동원한 공중강습 작전은 성과를 보았다. 나중에 생포한 공비의 진술에 의하면 “남한이 얼추 빨개져 너희들이 내려가기만 하면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교육을 받고 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공중으로부터 `불벼락'(사격)을 받아 모두 흩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얼마나 되는 적이 침투했는지도 모르던 상태에서 다행히 생포한 적으로부터 특수정에 의해 침투한 사실이며, 규모·목적 등을 파악하게 돼 본격적인 작전이 전개됐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육군은 전방 방어에만 주력하고 있던 터라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해 작전은 시일을 끌게 됐다. 당시 나는 제1야전군 작전참모였기 때문에 제2군 지역에서 일어난 문제에 관여할 수 없었지만 스스로 판단하기에 해상침투 한 적이 다시 해상으로 도주·이탈할 가능성보다 육로를 통해 야전군 지역을 통해 북상 도주할 공산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군 후방지역 경계 책임을 지고 홍천에 주둔하고 있던 제11사단장 이세규(李世圭)준장(육사7기·작고)에게 작전 준비지시를 내렸다. 이세규 사단장은 군에서도 이름난 강직하고 우수한 분이었다.

그러나 막상 제11사단지역에 적이 나타나자 작전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즉 적은 못잡고 아군의 희생만 속출하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한동안 지나니까 적이 나타날 때마다 병력 건제(建制)를 무시하고 축차(逐次) 투입을 해 하나도 자기 건제 대대를 갖는 연대가 없이 돼버렸다.

그리고 부대를 장기판 주무르듯이 무계획적으로 기동시켜 모두 지치는 바람에 어느 대대장은 대원들에게 업혀 다니는 식의 웃지 못할 형편이 돼 버렸다.

2003.05.19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 dangkim@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