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 (32)울진·삼척사태 예비군 투입

화이트보스 2009. 5. 18. 20:06

제1話 溫故知新 (32)울진·삼척사태 예비군 투입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1968년 11월 울진·삼척사태 당시 우리 군은 장군 진급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아마도 당시 육사 동기생 중에서 선두주자였고 1군 후방지역 경계책임을 맡고 있던 11사단장 이모 장군은 중앙에서 진급심사가 곧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의식해 공명심이 작용, 용병작전의 원칙을 간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사단장을 모두 소장으로 보임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준장 때 사단장을 하다가 `윗선'에 잘 보이면 사단장 재임 중 소장으로 승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준장으로 부임한 사단장들이 적이 있는 전방을 주시하기보다 서울만 쳐다보며 엽관(獵官) 행각을 보이는 사례가 있었다.

당시 선진 외국에는 이런 사례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1야전군 작전참모(준장) 시절 준장을 사단장으로 보임해 사단장 재임 중 소장으로 승진시키는 불합리한 제도의 문제점을 육군본부에 건의했다.

내 건의는 3~4년 뒤 장군 보직·인사제도 개선 때 반영됐다. 나 역시 69년 제1야전군 작전참모를 마치고 준장 시절 보병 7사단장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사단장 재임 중 소장으로 진급했다.

나는 이런 문제점으로 인한 사단장의 작전 미숙을 간파하고 때가 때인지라 심사숙고 끝에 서종철(徐鐘喆)1군사령관(육사1기·대장 예편)에게 건의, 군단장으로 하여금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도록 조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제점 말고도 다른 한편 새로이 작전 통제에 들어갈 원주에 위치하고 있던 2군 예하의 사단과 공수특전단 등 부대 규모가 커지기도 했거니와 그중에는 선임자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군 지휘체계상 후임자가 선임자를 지휘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건제(建制)를 무시한 부대들을 모두 정상화하는 데 72시간이 걸려 부득이 이 기간 중에는 작전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판단이 적중, 적은 계속 북상 도주를 시도했다. 이윽고 아군은 강원도 인제 부근에 있는 보병 2사단을 비롯한 전 전선부대에 경고하게 됐다. 적도 아군에 연일 쫓기느라 지칠 대로 지쳐 아군 부대가 망을 치고 있는 부근에서는 마치 추수 후의 이삭 줍듯 손쉽게 이들을 소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무공을 세운 2사단의 경우 때마침 2사단장 김학원(金學洹)장군(육사5기·중장 예편·작고)은 상부계획에 따라 미 알래스카에 있는 미군 산악 및 극한지 훈련에 파견돼 부재중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작전 성과가 평소 부대훈련을 잘 시켜 얻은 결과로 평가 받아 사단장 직무대행인 부사단장에게까지 무공훈장을 수여하게 됐다. 이 사례는 군에서 흔히 부대에 잘못된 일이 있으면 어김없이 지휘관에게 책임을 묻는데 부재중이라 하더라도 잘된 결과에 대해서는 포상해야 한다는 하나의 선례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아마도 당시 창설된 지 얼마 안돼 조직·장비·훈련 면에서 빈약하기 짝이 없었지만 전국 방방곡곡에 편제된 향토예비군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울진·삼척 무장공비 소탕작전은 더 장기화하고 아군의 희생도 더 컸으리라 생각된다.

향토예비군이 처음 대간첩 소탕작전에 투입된 것은 68년 6월24일로 창설된 지 겨우 두 달 정도 지나서였다. 이렇게 향토예비군은 68년 창설 첫해만도 5회에 걸쳐 연인원 89만 명이 동원돼 간첩 사살 19명, 생포 5명이라는 전과를 올렸다.

특히 두 달 동안 진행한 울진·삼척지구 군경 합동소탕작전 당시 향토예비군은 현역 군과 함께 간첩 사살 107명, 생포 7명이라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위용을 과시했다.

2003.05.21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