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 (25)1·21 무장공비 소탕작전

화이트보스 2009. 5. 18. 20:03

제1話 溫故知新 (25)1·21 무장공비 소탕작전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전개되던 어느 날 경기도 고양군 노고산 일대의 작전현장에 갔더니 제1사단 이익수(李益洙)연대장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박영석(朴榮錫)1사단장(육사5기·준장 예편)에게 물으니 즉답을 하지 못했다. 나중에 하는 얘기가 의무중대에 후송돼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상 치료차 후송된 것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헬기를 타고 노고산 일대를 정찰해 보니 고지에서 공비 3명이 발견됐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들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교통호에 은폐해 위에서 아래로 사격하며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연대장이 고지를 향해 무리하게 정면공격을 시도하다가 총을 맞은 것이었다. 의무중대에 가보니 이익수 연대장은 총알을 머리에 맞고 전사한 뒤였다. 박영석 사단장은 그런 사실을 차마 내게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30명밖에 안되는 `독 안에 든 쥐'를 잡는 데 약 2000명의 장병을 지휘하는 연대장이 전사한 것은 작전 실패를 의미했다.

그 이후 제2단계 작전이 시작됐다. 지금은 육군도 항공작전부대를 운용하고 있지만 당시는 미1군단에 헬기를 요청, 미군이 지원해준 헬기로 공중강습해 잔당을 일망타진했다.

그 후 원주 1군사령부에 돌아가니 박희동(朴熙東)참모장(육사3기·대장 예편)·이희성(李熺性)정보참모(육사8기·대장 예편) 등이 모여 이익수 연대장의 전사처리 문제를 숙의 중이었다. 분위기를 보니 연대장이 죽을 장소가 아닌 곳에 가서 죽었다며 작전 실패 쪽으로 기우는 것이었다. 작전 실패 쪽으로 결론이 나면 당연히 논공행상(論功行賞)은 고려되지 않는다. 나는 한참 듣고 있다가 “의견을 달리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작전참모인 내가 보기에도 작전 실패다. 그러나 이익수 대령이 등뒤에 총알을 맞은 것도 아니고 정면으로 맞았는데, 즉 도망하다가 맞은 것이 아니라 공격하다맞은 것인데 적절한 예우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그랬더니 좌중에서 무모한 작전 실패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반문했다.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총경은 경찰관이지만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작전에 참가한 야전군 연대장이 임무 수행 중 전사했는데 응분의 포상을 하지 않는다면 군의 사기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랬더니 더 이상 이의 제기가 없었다.

당시 육군본부에서는 사후대책에 대한 보고를 신속히 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래서 회의가 열린 것인데, 최규식 총경 못지않은 훈장 추서 및 1계급 특진, 그리고 전사자로서 국립묘지 안치 등을 조치할 것을 요청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익수 연대장(예현2기·준장 추서)은 1·21 무장공비 소탕작전에서 희생된 아군 중 최고위 계급자였다.

그는 일제 시절 학병 출신으로 6·25전쟁 때 배속장교로 군에 입문해 동기생들이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된, 고교 교사였던 이익수 연대장의 딸이 아버지를 추모하는 책을 낸 적이 있는데 그때 따님과 가족은 내게 각별한 감사의 뜻을 표했다.

1·21사태 전사자에 대한 합동 영결식은 1968년 1월29일 경기도 포천 6군단 사령부에서 이세호(李世鎬)6군단장(육사2기·대장 예편)의 주관으로 거행됐다. 성공한 작전이었다면 당연히 원주 1군사령부에서 거행됐을 것이다.

2003.05.05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 dangkim@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