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86>독일 경제부흥의 상징 ‘아우토반

화이트보스 2009. 5. 18. 20:28

제1話 溫故知新<86>독일 경제부흥의 상징 ‘아우토반

1964년 12월6일 김포공항에서 출국인사를 한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사의 보잉 707기를 타고 서독의 수도 본으로 향하는 긴 여행을 시작했다. 지금은 국제선에 취항한 규모 있는 국적 항공사가 2개나 있고 버젓한 대통령 전용기가 있지만 그때만 해도 국내에는 독일까지 장거리 비행을 해낼 여객기가 없었다.

그래서 통역관으로 선임된 독일에서 공부한 ‘경제학 박사 1호’ 백영훈 교수(중앙대)가 주한 서독 대사를 통해 서독 정부로부터 본∼도쿄 상용노선에 취항 중인 여객기 한 대를 빌렸다. 1등석과 2등석 일부를 비우게 하고 중간에 커튼을 친 다음 한국 대통령의 탑승기로 제공한 것이다. 따라서 상용노선에 취항 중인 이 여객기는 탑승한 승객들의 중간 기착지를 모두 경유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을 초청한 70세의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은 아들뻘인 박대통령을 따뜻이 맞이했다. 박대통령이 뤼브케 대통령과 환담 중 독일의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에 관심을 표하자 뤼브케 대통령은 “아우토반은 독일 경제부흥의 상징”이라면서 자신의 의전실장의 안내로 꼭 한번 고속도로를 달려볼 것을 권유했다.

박대통령은 이튿날 본∼쾰른간 고속도로를 시속 160km로 달렸다. 박대통령은 가는 길과 오는 길에 고속도로상에서 차를 멈추게 한 다음 내려 노면과 중앙분리대, 교차로 시설 등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리고 안내를 맡은 뤼브케 대통령 의전실장에게 고속도로 건설과 관리, 건설비 재원 등에 관해 소상히 물었다.

‘군사 영예 수행원’이라는 독일의 고유한 의전에 따라 현역 장성으로 박대통령을 수행·안내한 의전실장은 고속도로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서독의 지도를 펴놓고 고속도로망을 설명했으며 박대통령은 열심히 수첩에 메모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은 100달러에 불과했다. 통역으로 동행한 백교수에 따르면 박대통령이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할지 앞이 망막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자 뤼브케 대통령은 어깨를 다독거리며 서독 같은 우방이 있지 않느냐고 위로했다. 박대통령은 도움의 손길이 너무 절실한 때 손을 잡아준 뤼브케 대통령에게 정식으로 방한을 요청해 수락을 받았다.

그래서 박대통령은 서독 방문 때 받은 대접과 의전에 상응한 응대를 하기 의해 임시로 군사 영예 수행원을 뽑아 67년 3월에 방한한 뤼브케 대통령을 수행케 했다. 키도 크고 외국어 구사 능력이 있는 장군을 뽑다 보니 육본 작전처장(준장)으로 있던 내가 뽑혀 박정희- 육영수 대통령 내외 앞에서 면접시험을 치르며 상견례를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방한한 뤼브케 대통령 내외를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뤼브케 대통령은 당시 국영이던 영빈관(현 신라호텔)의 테이프를 끊은 최초의 국빈 방문자였다. 국적 항공기도 없던 시절이라 C- 54 군용기를 개조한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는데 기껏 안내한 곳이 동래의 금성전기 트랜지스터 라디오 공장일 만큼 산업시설이 전무한 때였다.

그때부터 경부고속도로 구상 등 박대통령의 본격적인 개발계획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처음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는 중장비 물자가 없어 야전군 공병장비까지 동원했는데 미국은 자국의 군원에 의한 전투물자를 비전투 부문에 사용한다고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또 국내에서도 이에 대한 반대가 있었으나 박대통령은 고속도로를 유사시 군사도로로 사용할 의도였기 때문에 주로 난공사 구간에 투입했다.

물론 거기에는 서독 정부가 분단국 한국에 제공한 차관 2억5000만 마르크(약 4770만 달러)가 종자돈이 됐다. 당시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밀가루·설탕 등 소비재 중심의 원조만 해준 미국과 기간산업 시설을 건설하도록 지원해준 서독의 원조 방식이 비교되곤 했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