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85>朴대통령 독일 방문과 율곡사업

화이트보스 2009. 5. 18. 20:27

제1話 溫故知新<85>朴대통령 독일 방문과 율곡사업

이제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율곡(栗谷)사업은 1974년부터 시작된 한국군 무기 및 장비 현대화사업을 일컫는 말이다. 이 한국군 전력증강사업을 가리키는 용어는 박정희 대통령이 임진왜란 전에 10만 양병설(養兵說)을 주장한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선생의 호를 따 암호명으로 부른 데에서 기원한다.

내가 뜻하지 않게 율곡사업에 관여하게 된 것은 74년 무려 4년 간의 한·미 제1군단(집단)사령부 부사령관 보직을 마치고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국장으로 재직하게 되면서부터다. 그러나 70년대 자주국방의 기치 아래 율곡사업을 추진한 박대통령과의 인연은 그로부터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4년 12월6일 박대통령은 서독을 국빈 방문했다. 64년 당시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1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국민 1인당으로 따지면 4달러도 안되는 셈이니 의식주를 해결하고 공장을 가동하기 위한 원료·부품을 수입할 수 없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중단해야 할 판이었다.

박대통령은 자유세계의 우방들에 손을 벌렸으나 세계는 냉담했다. 이웃 일본은 아직 우리와 국교가 없었고 미국 케네디 정부는 박정희 정부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박대통령은 서독에 매달렸다. 서독은 4000만 달러를 빌려주면서 한국이 간호사와 광부를 파견하고 그 품삯을 독일연방은행에 담보로 예치토록 요구했다.

사실 6·25전쟁은 일본뿐만 아니라 독일에도 전후 경제회복의 기점이 되기도 했다.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은 아시아에서의 일본 역할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방파제로 활용하기 위해 서독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6·25전쟁을 치르는 동안 독일의 산업생산은 더욱더 촉진됐다. 그리고 독일이 충분히 경제력을 회복한 60년대 초 한국은 독일이 베풀기 시작한 초기 해외원조의 수혜국이 됐다.

특히 박대통령이 취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할 당시 서독의 지원은 한국의 경제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미국의 원조가 정치적 이유로 끊긴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독일에 도움을 요청했고, 64년 박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한 시기를 전후해 독일로부터의 지원이 시작됐다. 61년 5·16 이후 군사정부에 최초의 해외 차관(借款)을 제공한 나라도 서독이었다.

당시 수억 마르크에 달하는 산업신용을 제공받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이 54년 서독으로 유학해 58년 서독 에르랑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 대한민국 경제학박사 1호를 기록한 백영훈(白榮勳)박사다.

백박사는 중앙대 교수를 지내다 박대통령에게 스카우트돼 대통령 경제고문, 생산성본부연구소장, 9·10대 국회의원,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 등을 역임한 ‘아이디어 맨’이었다.

당시 서독에 간호사·광부를 파견함으로써 양국 모두에게 경제적 이득을 안겨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인과 한국인들 간의 개인적인 친분과 가족적인 연대를 형성해준 광부·간호사 파독(派獨) 프로그램은 백박사가 고안한 아이디어였고, 독일 정부는 한국에서 받아들인 간호사와 광부들이 감동적으로 일하자 64년 12월 박대통령을 초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박대통령은 서독 방문 기간에 독일의 고속도로(아우토반) 시승을 통해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필요성과 ‘라인 강의 기적’과 같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겠다는 경제 대통령으로서의 각오,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의 폐허를 겪은 분단국으로서 독일처럼 부국강병(富國强兵)을 통한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질 수 있다는 비전을 갖기 시작했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