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현 한자교육진흥회장
1967년 6월5일 오전 7시45분. 지상공격이 있기 1시간 전에 이스라엘 공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의 전쟁은 시작된 지 불과 6일 만에 이스라엘군의 압도적 승리로 종결됨으로써 세계인과 특히 모든 군사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현대전에서 1주일 만에 전쟁이 끝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원칙은 불변한 것이어서 6일전쟁은 여전히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나는 6일전쟁이 끝난 직후인 67년 6월 중순 제1군사령부 작전참모(준장)로 보직됐다. 최전방 야전군사령부의 작전참모라는 직분상 현대전에 있어 6일 만에 전쟁을 승리로 종결지은 사실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무렵 사단급 이상 제대(諸隊)의 작전참모를 소집, 남과 북을 놓고 볼 때 어느 쪽이 이스라엘군에 가까운가라는 질문을 던져 자성케 해본 일이 있다.
그러나 아직 전투 상보(詳報)를 접할 수는 없고 신문보도에 의존할 정도여서 이스라엘 무관을 통해 이를 요청, 전투에 참가했던 여단장급 이상의 지휘관들이 작전종료 후 각자 출동단계에서부터 작전종결까지의 행동경과를 보고한 것을 급한 대로 타자원지로 등사한 사본을 보내줘 마치 실전을 보는 것 같은 생동감을 느끼면서 읽은 일이 있다.
이처럼 빠른 시일 내에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던 데는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 동기생인 지비 장군이 당시 이스라엘군 작전국 차장으로 있었던 것이 큰 힘이 됐다.
나는 이 보고서를 읽으면서 흥분과 감동을 금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국력에 있어 비교도 안될 만큼 열세한 나라가 단기간에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당시 국토라야 우리나라 경상북도 크기와 비슷하고 인구는 280만 명인데 비해 주변에는 이들의 생존과 존립을 거부하는 1138만㎢의 넓은 지역에 아랍연맹 14개국 1억500만 명의 아랍인이 적대하고 있어 인적자원 면에서 무려 40배를 넘는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6일간의 전쟁을 통해 자기 영토의 3.5배나 되는 지역을 점령, 6만8000㎢의 면적에 약 100만 명을 군정 하에 두고 있었다.
이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기까지는 이들의 독특한 국가 형성과정, 정치형태, 사회제도, 종교 등 많은 요소가 있지만 순수한 군사적인 면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이스라엘 국방군의 발전과정을 보면 역사적 전통을 살려 시민군제도를 유지·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국민을 위한 군대’라기보다 ‘국민이 곧 군대’라는 개념에 기반을 둔 철저한 국민 총동원제도를 유지·발전시킨 것이다.
또 이스라엘군은 53년부터 ▲행정지원 분야 축소 및 전투부대 강화 ▲공군·기갑부대 등 공격전력 증강 ▲보급·재정·의무 등 행정지원 업무의 민간(국방성) 이관 및 군의 전투수행 전념 ▲예비군의 신속한 동원과 전력화를 위한 기술적 문제 해결 등을 골자로 한 18개항의 전력증강계획을 추진해왔다.
그리고 이런 중요한 시기에 애꾸눈으로 유명한 모세 다얀 장군이 총참모장으로 발탁돼 4년 여의 재임기간에 군을 신장비로 무장케 하고, 전(全) 장교에게 공수·특수훈련을 받게 해 전투 위주 근무체제로 전환하는 등 군을 탈바꿈시켰다. 바로 이와 같은 전력증강과 군사혁신이 6일전쟁의 전 과정에서 진가를 발휘한 것이다.
당시 나는 야전군 작전참모로서 ▲철저한 자력(自力) 국방의식 ▲양보다 질 우위 ▲우월한 정보능력 ▲공세적 방어전략 ▲속전속결전략 ▲즉각 대량보복전략 등을 6일전쟁의 교훈으로 도출했다. 물론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지도자의 솔선수범과 국민적 단합이었다.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벤 구리온 수상이 임기를 마치고 키부츠 집단농장에 들어간 것이나 해외 유학생들이 전쟁 소식을 듣고 앞다퉈 귀국한 것 등이 좋은 예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