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국군의 무공훈장 종류에는 태극·을지·충무·화랑·인헌 무공훈장의 다섯 가지가 있다.
나는 6·25전쟁 당시 대대장 시절 제5사단 36연대 2대대 소속 정휴생(鄭休生)상병의 무공에 대한 포상을 상신해 병(兵)에게는 최상급 훈장인 금성 충무 무공훈장을 수여한 적이 있다.
정상병은 1953년 6월 정전협정 조인을 앞두고 서로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때 60mm 박격포 사수로 치열한 전투 끝에 ‘제2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중대 공용화기인 60mm 박격포를 들고 70시간 동안 적의 포위망을 뚫고 돌아온 ‘산악의 왕자’였다.
우리 군은 대체로 훈·포장 수여가 무질서한 편이었다. 특히 창군 초기에는 훈장을 남발했다. 예를 들어 ‘전투에 참가해 필사의 각오로 비범한 능력을 발휘, 부대의 승패를 좌우하고 그 공적을 국내외적으로 선양할 만한 유공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 무공훈장은 사실상 ‘죽어야 타는 훈장’인 데도 이를 2∼3개씩 받은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또 이처럼 훈·포장 수여가 무질서하다 보니 어느 나라든지 군 형법상 하극상의 죄에는 그 벌이 총살형밖에 없는데 12·12 쿠데타를 일으킨 반란군이 제 가슴에 훈장을 다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미국은 우리처럼 훈장을 남발하지 않는다. 미군도 다섯 가지 전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최고훈장은 일반적으로 의회명예훈장(Congressional Medal of Honor)이라는 훈장이다. 의회명예훈장은 한 사람이 받고 대부분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에게 돌아가는 특징이 있다. 또 미국 훈장에는 돈을 지급하지 않는데 의회명예훈장에 한해서는 월 소정액의 연금이 종신토록 지급되며 하사관은 퇴직금의 10%를 증액받는다. 또 수훈자의 자녀 중 남자는 무시험으로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
전투 중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무가 요구하는 이상의 공을 세운 군인에게 대통령이 수여하는 이 훈장을 살아서 받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6·25전쟁 중 이 훈장을 받은 미군은 131명(생존 수상자 39명)으로 그 가운데 해병대 수훈자가 41명으로 가장 많았다. 특히 흥남 철수작전을 엄호한 장진호 일대 작전 당시 해병 대대장으로 중공군에 포위된 절망적 상황에서 “후퇴가 아니라 또다른 방향으로의 공격”이라고 독전하며 탈출에 성공한 데이비스 중령은 살아서 의회명예훈장을 받고 훗날 해병대사령관까지 역임했다.
미국에서 명예훈장을 패용한 사람은 부대 의장행사 등 모든 공식행사에서 계급에 상관없이 우측에 선다. 또 부대 내 중요시설을 명예훈장 수상자의 이름을 따 명명함으로써 영원히 기록된다. 또 명예훈장 수상자는 본인과 가족이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빈객(賓客)으로 초청받는다. 한번은 한·미 1군단 부사령관 시절(1970∼74년) 군단장 부관인 미군 소령 내외가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받아 워싱턴에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베트남전 참전 명예훈장 수상자였다.
한편 맥아더 원수는 의회명예훈장을 포함해 미 육군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지만 그에 관한 기사나 전기(傳記)에 실린 사진 어디에도 훈장을 패용한 모습을 볼 수 없다. 모든 공훈을 부하들에게 돌리고 싶어하는 장군의 겸허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처럼 미군의 명예훈장은 그 대상이 엄격하되 일단 받으면 엄청난 특전이 주어지므로 포상을 상신받으면 전투가 벌어진 실제 장소와 유사한 지형에서 당시 전투상황을 재연하고 입증하는 등 일종의 철저한 ‘현장검증’을 거쳐 포상한다.
나는 미군의 이러한 신상필벌(信賞必罰)제도가 부러워 6군단장 재직 때 “나눠 먹기식 훈·포상은 의미가 없다”며 육본에 미국식 훈포상제도 도입을 건의하기도 했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