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육군 현역장교들의 임관구분은 일반인에게도 낯익은 육사·학군·3사·갑종 등이 대부분이지만 예비역장교들의 경우에는 이를테면 특임·현임·호사 같은 낯선 임관구분을 종종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생소한 임관구분은 대부분 전시(戰時)에 생긴 것이다. 6·25전쟁 초기 병사들의 보충은 가두모집이나 강제징집 같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나 병사들을 지휘통솔해야 할 장교들의 보충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국방부는 다양한 장교 임관제도를 도입했다.
대표적인 것이 현지임관(現地任官)제도다. 육군본부는 1950년 8월29일 육군보충장교령을 만들어 하사관들을 소위로 현지임관시켰다. 이들은 대부분 국방경비대 이래 군에 복무하면서 공비토벌 작전 등에 참가해온 덕분에 실전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많았다. 6·25전쟁 중 ‘현임’ 제도에 의해 하사관에서 소위로 임관된 장교는 5000명에 이르렀다. 현임장교로는 소장 계급이 최고인데 이등병에서부터 육군소장까지 17계급을 진급한 최갑석(崔甲錫·현임·소장 예편)전 2군 부사령관이 대표적 사례다.
‘특임’은 말 그대로 특별임관의 줄임말이다. 우선 광복 전에 일본군(만군)이나 중국군, 그리고 독립군(광복군) 고급장교로 활동하다가 광복이후 창군과정에 특별임관된 경우가 있다. 중국군 소장으로 있다가 창군과정에서 준장으로 특별임관된 김홍일(金弘壹)장군이 대표적 사례다. 이 밖에 전쟁 중에 특별임관된 경우도 있는데, 인민군 장성으로 참전했다가 체포돼 귀순한 정봉욱(鄭鳳旭·특임·소장 예편)사단장이 대표적 사례다. 요컨대 대부분 외국군(북한군 포함) 장교 경력자들이 국군에 특별임관된 사례다.
육사10기와 첫 정규 4년제 기수인 육사11기 사이에는 ‘생도2기’라는 특이한 임관구분이 있다. 원래 첫 정규 4년제 사관생도가 입교한 것은 6·25전쟁 발발 불과 20여 일 전인 50년 6월1일이다. 이들은 첫 2년제 사관생도들로 모집했다가 6·25전쟁이 터져 졸업을 앞당긴 육사10기생(생도1기)들과 함께 전선에 투입됐다. 총 333명의 생도2기생 가운데 134명이 전사 또는 실종됐다. 생도2기 출신으로는 김용진(金容振·중장 예편)·장정렬(張正烈·중장 예편) 등이 있다.
50년 7월 전쟁 통에 육사가 임시 휴교하면서 생도2기생들은 8월15일 만들어진 육군종합학교에 편입됐다. 심각한 초급장교 부족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전시 장교 속성사관학교’였다. 종합1∼3기생들의 교육기간은 6주에 불과했다. 종합학교는 개교 이후 10개월 동안 7000명의 소위를 배출했으며 이 가운데 1300여 명이 전사했다. 권영각(權寧珏·포간5·중장 예편)전 건설부장관·장태완(張泰玩·종합11·소장 예편)의원 등이 종합 출신이다.
종합학교가 51년 9월 제32기를 끝으로 문을 닫은 후에는 갑종(甲種) 간부후보생제도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전쟁 중 교육기간은 24주였다. 오자복(吳滋福·갑종3·대장 예편)전 국방부장관·정호근(鄭鎬根·갑종5·대장 예편)전 합참의장이 갑종 출신이다.
전쟁 전에는 호국군(護國軍)제도가 있었다. 48년 11월20일 공포된 국군조직법에 의하면 “육군은 정규군과 호국군으로 조직한다”고 돼 있다. 호국군이란 평소 생업에 종사하다가 유사시 군에 소집되는 일종의 예비군이었다. 이 호국군의 지휘관들을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호국군사관학교였다. 호국군사관학교는 49년 4월부터 8월까지 4기에 걸쳐 1080명을 배출했다. 호국군이 해산된 후 호국군 장교들은 이후 640명이 현역으로 편입됐다.
‘호국군’, 즉 예현(예비역에서 현역 전환) 및 ‘호사’ 출신에는 박노영(朴魯榮·예현2·대장 예편)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정웅(鄭雄·호사4·소장 예편)전 의원, 1·21사태 당시 전사한 이익수(李益洙·예현2·준장 추서)대령 등이 있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