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육사8기생으로 입교 당시 교장이었던 최덕신(崔德新)대령이 1949년 1월 제3사단장으로 전임된 뒤를 이어 항일독립 투쟁의 명장 김홍일(金弘壹)준장이 7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교수진은 부교장에 유재흥(劉載興)대령, 행정처장에 조암(趙岩)중령, 정보처장에 강이사(姜利師)소령, 교무처장에 강창남(姜昌男)중령(나중에 朴炳權 중령으로 교체), 후방처장에 이창일(李昌一)중령, 교도대대장에 김동빈 소령 등. 그리고 사관후보생대 제1대대장에 김종갑(金鐘甲)중령, 제2대대장에 박병권 중령(나중에 黃燁 중령으로 교체) 등이었다.
특히 매주 월요일 첫시간에 진행된 김홍일 장군의 정신훈화는 장교의 자질을 함양하고 임전무퇴의 강병교육에 크게 기여했다. 해박한 군사지식과 야전경험에서 얻은 지휘관의 자질을 강조한 정신훈화는 6·25전쟁 발발 전에 이미 옹진전투, 혹은 지리산·태백산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해 실전경험을 쌓은 8기생들에게 피와 살이 돼 일선 소대장으로 6·25 남침을 최전방에서 저지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나는 49년 5월 소위 임관 후 동기생 70∼80명과 함께 제2사단(대전)에 배치됐다. 나는 사령부 고급부관실에 보직돼 다른 동기생과 달리 초임장교가 영외생활을 하는 ‘호사’를 누렸다. 그런데 일본 육사 출신으로 장래가 촉망되던 고급부관 겸 인사참모인 김태성(金泰星·육사2기)소령이 권총 자살한 사건이 터졌다. 그때는 지금처럼 부관병과가 독립되기 전으로 병과장교 중 우수한 장교가 선발되는 구 일본군 관습이 적용되던 때였다.
그런데 나는 당시 동기생들이 소대장으로 병사들과 영내에서 동고동락하는 것이 부러웠다. 그래서 김태성 소령에게 연대 단위 이하 전투부대 재배치를 간청했다. 김소령은 다른 장교들은 사령부에서 근무하기를 원하는데 이상한 친구라며 잔말 말고 근무하라고 핀잔을 줬다. 그러나 나중에 이름을 이성가(李成佳)로 개명한 참모장 이정일 대령(군영·소장 예편)에게 다시 간청하자 그는 기특한 장교라며 허락해 나는 신설 제25연대에 배치됐다.
김태성 소령은 죽기 전에 참모총장을 비롯한 상관과 동료, 그리고 입대 전 동래여고에서 교편을 잡던 시절부터 따르던 여성 앞으로 유서를 남겼다. 그는 상관이 부하에게 모든 것을 미루는 군대에 환멸을 느껴 자살했다. 그의 상관은 중국 국부군 출신의 채원개(蔡元凱) 제2사단장이었다. 그 당시 중국 군대는 군기가 문란해 국부군에 대한 미국 원조 군사물자를 싣고 온 선박이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통째로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넘어갈 정도였다.
김소령의 자살은 보급군기가 문란한 국부군에서 물건을 팔아먹은 경험이 있는 채사단장이 거꾸로 중국에 팔아먹으려다가 수사기관에 적발된 것이 발단이 됐다. 밀가루 수천 포대를 군산항을 거쳐 중공으로 반출을 기도하다가 수사기관에 적발됐는데 사단장의 지시에 의해 관인 물품반출증이 김소령 이름으로 나갔기 때문에 수사선상에 오르자 상관은 발뺌하고 김소령 혼자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그는 헌병들이 오자 현관에 세워두고 들어가는 길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나는 모든 책임을 망자(亡者)에게 씌우는 일 처리를 보고 의분을 느낀 나머지 참모총장에게 탄원서를 내기도 했다. 군대사회의 부패상과 의리 없는 군의 실태에 실망해 이를 고발한 것이다.
내가 배치된 신설 제25연대에는 하사관 수효가 태부족했다. 나는 마침 하사관교육대가 연대본부 직속으로 돼 있어 부관요원(구대장)으로 보직돼 자원입대한 신병교육을 담당하면서 하사관후보생 요원을 모집하기 위해 도내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입대권장 강연을 했다. 그러다 여순반란 사건의 반란군 잔당과 북에서 남파한 인민유격대가 합세, 후방을 교란하자 49년 10월께 이를 소탕하기 위해 설치한 태백산지구 전투사령부에 전 연대가 배속돼 경북 영양·청송·영덕, 경남 거창 등지에서 토벌작전을 전개하게 됐다. 내가 겪은 최초의 실전전투였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