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79> 군복 벗을 뻔한 사건

화이트보스 2009. 5. 18. 20:24

제1話 溫故知新<79> 군복 벗을 뻔한 사건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현 한자교육진흥회장

나는 6·25전쟁 발발 전에 태백산·덕유산 두 곳에서 임관 후 처음 게릴라전 실전 경험을 갖게 됐다.

한 곳은 평양의 강동(江東) 정치학원에서 유격훈련을 받고 남파된 김달삼(金達三)부대가 활동하는 경북 일대였고, 다른 한 곳은 자생(自生) 빨치산인 노영호부대가 근거지로 삼은 무주 덕유산 일대였다. 한양대 출신의 노영호는 6·25전쟁 때 추풍령에서 기차를 전복, 습격하기도 했다.

나는 처음 경북 안동에 본부를 둔 태백산지구 전투사령부 25연대 2중대 선임장교 겸 소대장으로 경북 청송에 주둔하며 토벌작전을 수행하면서 김달삼부대를 섬멸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경북 영덕에 있는 대대본부 S-1(인사참모) 겸 S-3(작전참모)에 보직돼(참고로 S-2는 정보참모) 임관 후 처음으로 참모 근무를 경험했다.

나는 산중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며 우리 군의 지휘관들보다 빨치산 지휘관들이 더 부대원들에게 리더십을 가진 사실을 깨닫게 됐다. 행군 중에도 부하들을 안전한 자리에 배치하고 주력(主力)을 엄호하며 후퇴하는 등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우리보다 더 잘 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고도 틈만 나면 집단토론을 통한 정신교육을 했다.

그래서 나도 질세라 1200고지 이상의 진지에 거주하며 부대원들과 동고동락을 자처했다. 그 당시 다른 부대들은 지휘관들이 산중 부락의 초가집에서 기거했다. 나는 겨울이면 온기 없는 1200고지 진지에서 키운 진돗개를 발 밑에 데려다 놓고 그 체온으로 동상(凍傷)을 예방하곤 했다. 그때 산중에서 진돗개를 키운 경험 때문에 나는 그 이후에도 집에서 줄곧 진돗개를 키웠다.

나는 게릴라전에서 게릴라와 주민은 마치 물고기와 물의 관계와 같아 주민의 협조 없이는 성공적인 작전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 장병이 민폐를 근절하고 선무공작(宣撫工作)에 주력하다 이에 역행하는 현상이 있어 이를 바로잡으려다가 군복을 벗을 뻔했다.

당시 영덕지구에 헌병파견대가 생겼는데 파견대장 M중위(6·25 때 전사)는 작전부대가 세워놓은 민·군 유대관계와 군기를 뿌리부터 파괴하는 행위를 일삼곤 했다. 작전을 지원하러 온 부대가 오히려 작전부대의 작전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자 민원이 극심했다. 나는 혈기왕성하던 때라 파견대장에게 시정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이를 트집잡아 부대활동에 지장을 주곤 했다. 그래서 하릴없이 연대장에게 서면으로 직소(直訴)하기에 이르렀다.

직소의 요지는 군은 국토와 국민의 생명·재산을 지키는 것을 본분으로 하고 있음을 망각하고 ▲은행 건물을 접수, 사무실로 사용함으로써 은행 고유의 기능을 마비 ▲지역 내 각급 학교 여교사를 야반에만 소환 조사하는 등 월권행위 ▲작전본부 간부들은 모두 영내에 거주하고 있는데 헌병대장은 여관에 투숙, 음란한 생활 ▲각종 요식소에 외상값 과적 등과 같은 행동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연대장은 헌병대의 존재가 백해무익하니 차라리 철수시켜 달라는 건의를 받아들여 즉각 철수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이 무렵 육군본부 직속으로 독립된 부대 지휘계통에 있었던 헌병부대는 오히려 나를 반군행위로 규정, 한번의 본인 신문도 없이 일방적으로 상부에 각종 날조된 비행을 보고하면서 파면을 건의한 것이다. 다행히 국방부로부터 당사자의 진술서나 조서가 없다는 이유로 연대로 반송됨으로써 나는 이런 일이 진행됐음을 나중에 연대장으로부터 듣게 됐다.

당시 국방부에서 서류를 자세히 보지 않고 결재했더라면 나는 까닭도 모른 채 군복을 벗게 됐을 것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지휘관생활을 하면서 부하의 신상에 영향을 주는 징계·군법회의 서류는 아무리 바빠도 정독 후 결재하고 가능하면 감형하려고 노력했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