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현 한자교육진흥회장
전시(戰時)에 미 해군 수송선을 타고 갔던 1차 도미유학(1951년 9월∼1952년 3월·포트 베닝 보병학교) 때와는 달리 2차 도미 때는 여의도 군용비행장에서 미 군용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부근 공항에 내려 산타페(Santa Fe)라는 기차를 타고 이틀 만에 리브워스(Ft. Leaveworth) 부근의 역에 내렸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서부터 같은 기차에서 만난 최초의 외국군 장교는 일본 자위대 장교 2명이었다. 그때만 해도 양국 간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반일·반공정책 때문에 일본인들과 자유로이 대화하지 못하는 때여서 군복을 보고 서로 식별 하면서도 식당차나 전망차에서 대화 없이 멀뚱멀뚱 쳐다보며 지냈다. 어느 한쪽이 먼저 인사해야 대화가 이뤄지는데 우리가 먼저 ‘저자세’가 되고 싶지 않은 심사도 작용했다.
역에 내리니 우리 일행을 위한 승용차 1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두 번째 도미유학인 우리 일행은 학교에서 보내온 안내서대로 사전에 도착시간·인원 수 등을 전문(電文)으로 알리고 왔는데 일본 장교들은 초행이라 그런 절차 없이 왔기 때문에 승용차가 나오지 않았다. 일본 장교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는 빛이 역력해 우리는 승용차를 그들에게 양보하고 마중 나온 안내장교로 하여금 다른 차를 오게 했다.
그러자 기차에서 이틀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지낸 일본 장교들은 일본인 특유의 고맙다는 제스처와 함께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 일로 우리에게 신세를 진 이들은 같은 외국군 장교 숙소인 펀스턴 홀(Funston Hall)에서 1년간 지내며 함께 교육받은 40여 개국 장교 중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됐다.
패전 전의 구(舊)일본군 육사·육대(陸大)를 나온 영관급 엘리트 장교인 다카다(高田)중령과 히로타니(廣谷)중령은 나중에 자위대 요직을 거치는 동안에도 교분을 유지했다.
이곳에서의 교육과정은 많은 유익한 경험을 갖게 해주었다. 특히 암기보다 개념 정립을 중시하는 토론과 커리큘럼이 인상적이어서 매번 작전개념의 적부(適否)가 논의의 중심이 되곤 했다. 때때로 실시되는 외부 저명인사들의 특강도 유익했다.
또 미군 장교의 경우 시간을 선용(善用)하기 위해 가족들이 작전용 지도의 채색을 한다든지, 남편이 읽어야 할 과제물의 상당한 부분을 녹음했다가 읽는 대신 들으면서 동시에 딴 일을 할 수 있게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가족이 한 팀이 돼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외국 장교 중 가족을 동반하지 못하는 나라는 한국·일본·대만·터키·베트남·태국 등 이른바 군원에 의해 온 나라뿐이었다. 당시 코카콜라 한 병 값이 5센트였으니 지금의 화폐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정부 보조 1달러를 보탠 6달러로 식비·방값·세탁비·신문대·우편료 등 한 달을 생활해야 했으니 아무리 독신생활이지만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과정에는 자국 소개 프로그램도 있어 출국 전 미리 전시용 물품을 준비해오거나 주미 대사관의 지원을 받기도 했는데, 그 무렵 우리나라는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채 안되고 별로 자랑할 것도 없던 실정이라 궁색함을 겪어야 했다.
나중에는 한국군 장교들이 미 육군대학(National Army War College)에 유학할 수 있는 길도 트였지만 그때는 지휘참모대학이 유일한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현재의 리언 J 라포트 주한미군 및 한미연합사령관과 신일순(申日淳)한미연합부사령관(육사26기)은 공교롭게도 미 지휘참모대학 동기생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