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74>美 지휘참모대 유학의 교훈

화이트보스 2009. 5. 18. 20:22
제1話 溫故知新<74>美 지휘참모대 유학의 교훈

한국군 장교 중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을 최초로 마친 사람은 6·25전쟁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육·해·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정일권(丁一權)중장과 육본 작전국장을 지낸 강문봉(姜文奉)소장 두 사람이다.

원래 지휘참모대는 미군의 경우 주로 소령, 한국군은 중령 때 입교했는데 6·25전쟁 당시 미8군사령관을 지낸 밴플리트(Van Fleet)장군이 계급이 높은 지휘관부터 교육시킬 것을 건의, 초기에는 ‘별자리’들이 영관 계급장을 달고 교육받았다.

당시는 전란(戰亂)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도 미국 원조에 의해 나라의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을 때여서 군사교육을 받기 위한 도미(渡美) 유학도 전적으로 군사원조에 의존했다. 지금은 전액 우리 정부 재원(財源)으로 부양가족까지 함께 가서 지낼 수 있게 됐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도미 군사유학생들의 계급도 초기에는 모두 사단장급 이상 장성급 장교들이 주류를 이루고 수효도 많을 때는 15명이나 됐다.

아마도 당시의 미군 수뇌부가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군 장성의 재교육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6·25전쟁 당시 미8군사령관과 미 극동군사령관·유엔군사령관을 역임한 리지웨이(Ridgway)장군은 회고록 ‘The Korea War’(한국전쟁)에서 당시 한국군 사단장급에 대해 “중대단위의 실전 경험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혹평할 정도였다.

지금은 육군 지휘참모대 학생들의 계급도 영관급이고 졸업 후에는 모두 육군대학 교관으로 보직돼 그곳에서 이수한 내용을 학교교육이나 교리발전에 원용한다. 뿐만 아니라 지휘참모대 선발 장교 수도 1년에 5명을 넘지 않는다. 오랜 군원(軍援) 기간을 거쳐 이제 재정적으로 자주국방을 할 수 있게 된 덕분일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 우리 육군대학도 우방 군대의 유학생을 매년 몇 명씩 받아들이고 실로 ‘배우러 가던 군대’에서 ‘가르치는 군대’로 탈바꿈한 것이다.

내가 포트 리브워스(Fort Leaveworth)에 있는 미 지휘참모대학(정식명칭은 미 육군 지휘 및 일반참모대학)에 간 것은 자유당 정권 말기인 1959년이었다. 참모대학 선발시험에 응시하게 된 것은 아주 단순한 동기였다.

중령 시절 육본 인사국에 근무할 때인데 이 무렵 수뇌부가 중요 보직자를 인선할 때는 으레 미 참모대학 이수자 명단을 찾곤 해서 장교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참모대학에 갔다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준비없이 스스로의 능력도 점검해보고 시험 수준도 알아보기 위해 응시했다. 결과는 물론 낙방이었다.

그러나 나도 준비하면 안될 것이 없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리하여 6개월간 지금의 여군 훈련소 자리에 있던 육본 BOQ에서 시험공부를 했다.

당시 왕십리 셋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출퇴근에 소요되는 시간을 아끼고 셋이나 되는 아이들로부터 떨어져 지내기 위한 방안이었다. 이 때문에 상사로부터 가정불화가 있어 별거한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나는 단기과정에나 다녀왔으면 하는 소망을 가졌다. 그런데 이 무렵 미군 당국의 요청과 장성급 장교보다 영관급 장교를 정규과정에 보내 귀국하면 육군대학 교관으로 보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반영돼 영관급 장교 3명이 정규과정에 입교하게 됐고 나도 거기에 끼게 됐다.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의 “준비가 있으면 기회는 찾아온다”는 말을 체험한 셈이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