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71> 美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화이트보스 2009. 5. 18. 20:21
제1話 溫故知新<71> 美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비록 전쟁이 교착상태였다고는 해도 전쟁을 최일선에서 수행하는 청년장교 수백 명을 선발, 6개월 동안 미 육군 보병학교에 유학을 보낸 것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리지웨이(Mathew B Ridgway)대장의 일대 결단이었다.

물론 미군의 처지에서는 한국군 장교단의 유학교육을 통해 근대화에 눈뜬 친미(親美) 혹은 지미(知美)파 장교들을 양성한다는 측면이 있지만 한국 편에서 보자면 군이라는 집단이 우리 사회에서는 처음으로 근대화 및 민주주의 교육과정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때 1차 도미유학 장교단의 김종필 대위를 중심으로 한 동기생들이 주축이 돼 그로부터 10년 뒤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근대화를 추진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리지웨이 장군은 한국군뿐만 아니라 한국의 근대화에도 큰 영향을 준 미군 장성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제82공수사단장·제18공수군단장으로 참전해 유럽 전선의 영웅이었던 미 육군부 작전 및 행정 참모부장 리지웨이 중장이 일본 도쿄(東京)에서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장군의 명령을 받아 차량사고로 급서(急逝)한 8군 사령관 월턴 워커(Walton H Walker)중장의 후임으로 한국전선에 부임한 것은 1950년 성탄절이었다. 그는 늘 가슴에 두 발의 수류탄을 달고 다녀 마치 그것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등록상표)처럼 인식되고는 했다.

6·25전쟁에서 리지웨이 장군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중공군 개입 이후 후퇴와 패배를 거듭하던 유엔군이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지평리 전투다.

51년 2월 경기도 양평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미·프랑스 연합군은 그동안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열세를 만회하고 중공군에 결정적 타격을 입히는 최초의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지평리 전투는 무엇보다 전장에서 지휘관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모범적인 사례를 제공했다.

우선 중공군에 포위된 미 23연대 전투단의 프리먼 연대장은 부상 중에도 후송을 거부하고 장병들과 생사를 함께함으로써 9만 명 대 4000명(23대1)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이었다. 또 제1,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58세의 고령임에도 프랑스에서의 영구계급인 중장을 포기하고 6·25전쟁에 지원, 보병대대를 지휘한 백전노장 몽클레아(Raoul Monclar)중령과 그 휘하의 직업군인들은 용맹성과 사기로 연합군을 고무했다.

그러나 이는 6·25전쟁 부임 당시 맥아더 사령관에게 공세이전(攻勢移轉)을 건의해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8군은 자네의 것일세. 자네가 최선이라고 생각되면 무엇이든 하게”(The Eighth Army is yours. Do whatever you think best.)라고 허락을 받은 리지웨이 장군의 운명을 건 도박의 결과였다.

리지웨이 장군은 중공군의 개입과 1·4후퇴 이후 후퇴 일로에 있던 유엔군이 51년 1월25일을 기해 일제히 반격에 나선 ‘라운드업’(Roundup) 작전을 개시하면서 중공군 린퍄오(林彪)중공군 사령관이 지휘하는 제4야전군에 포위된 미 23연대 전투단이 고립된 지평리 전장을 중공군의 포화를 무릅쓰고 헬기를 타고 방문, 장병들을 격려했다. 직접 전장까지 날아와 “오늘 밤만 더 버텨달라”고 한 격려와 야전군 지휘관으로서 자랑스럽게 가슴에 매단 수류탄 두 발이 고립된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켰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6·25전쟁 당시 인해전술로 나온 중공군을 물리치고 효과적인 방어전략을 수립, 한반도의 절반을 공산화 위기에서 구해낸 리지웨이 사령관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가려 전공에 걸맞은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나는 66년 그의 향리(鄕里)인 미국 피츠버그 시에서 장군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연유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유럽 전투에서 공수사단을 지휘했는데 공중에서 낙하하는 데는 사단장도 사병들과 똑같이 근접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때부터 수류탄을 달고 다녔다고 말했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