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69>6·25전쟁이 군에 미친 영향

화이트보스 2009. 5. 18. 20:20
제1話 溫故知新<69>6·25전쟁이 군에 미친 영향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현 한자교육진흥회장

미국은 6·25전쟁에 보병 8개 사단을 포함, 지상군 30만 명 등 연인원 178만9000명의 병력을 참전시켜 한국의 공산화를 막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근대화에도 결정적 공헌을 했다.

특히 비록 전쟁이 교착상태였다고 해도 전쟁을 최일선에서 수행하는 청년 장교 수 백명씩 선발, 미 육군군사학교에 유학 보낸 것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일대 결단이었다.

1951년 5월17일 수립된 미국의 대한(對韓)정책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한국군을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전력을 증강시킨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와 같은 정책이 발표되자 한국 정부는 미국에 10개 사단을 추가로 창설할 수 있도록 원조해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당시 6·25전쟁에 참전한 자유진영의 병력은 모두 17개 사단이었으며 그중 10개 사단은 한국군이었다. 그럼에도 한국군은 화력이 미약하고 장교 및 병사의 교육기간이 짧은 데다 실전경험 또한 부족한 탓으로 전력은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로 인해 한국군은 각 지구의 전투에서 성공보다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유엔군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중공군의 4월 공세가 감행됐을 때 한국군 1개 사단이 사창리에서 참패하고 5월 공세 때에는 1개 군단이 와해되는 사태가 벌어짐으로써 한국 정부의 10개 사단 추가 증설 요청은 묵살되고 말았다. 그 대신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Mathew B Ridgway)대장은 한국군의 전투력이 약한 이유가 교육훈련이 부적절하기 때문이라고 판단, 먼저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그 일환으로 리지웨이 사령관은 한국군 장교들을 미 육군군사학교의 보수과정을 이수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워 51년 9월부터 매회 250명(보병 150명·포병 100명)씩 위탁교육을 실시하게 됐다.

또 그때까지 18주간이었던 장교 후보생 교육과정이 24주로 연장됐으며 한국군 보병사단에서 9주간의 사병 보충교육을 시키게 됐다. 그리고 그 당시까지 10일 이내이던 신병교육 기간을 8∼12주로 늘리고 52년 초부터 4년제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의 교육이 재개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제82공수사단을 이끌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한 리지웨이 사령관이 보기에는 한국군의 열악한 실정에 제2차 세계대전 버금가는 전투에 투입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 들 법했다.

실제로 한국군 사단장 중에는 중대단위 전투 이상의 전투경험이 없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이렇게 해서 6·25전쟁 중인 51년 9월 육군은 지휘관 및 참모의 자질향상과 군의 전력증강을 위해 1차로 보병장교 150명과 포병장교 100명을 선발, 보병학교가 있는 조지아 주 포트베닝(Fort Bening)과 포병학교가 있는 오클라호마 주 로턴(Lawton) 근처 포트실(Fort Sill)로 한국군 최초의 집단 군사유학을 보냈다. 이들은 6개월간 소정의 교육을 받고 52년 3월13일 졸업, 4월20일 인천항을 통해 귀국했다.

52년 1월 하순, 미 합동참모본부는 한국군의 전투능력 향상에 관한 사항을 검토한 결과 한국군 장병들이 적절한 훈련과 지도를 받으면 능히 독자적으로 국토방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질을 지닌 것으로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운 좋게 포트베닝 보병학교 1차 유학생으로 선발됐는데 미국의 군원(軍援)에 의존한 이 제도는 150명씩 보낸 보병의 경우 55년 8차 유학생을 끝으로 총 1200명을 유학 보내고 끝났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