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67>??? 이승만과 트루먼의 전쟁지도(하)

화이트보스 2009. 5. 18. 20:19
제1話 溫故知新<67>??? 이승만과 트루먼의 전쟁지도(하)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공자(孔子)는 자고로 “정치는 경제를 풍족하게 하고(足食), 국방을 튼튼히 하며 (足兵), 백성을 믿고 따르게 하는 것 (民信)”이라고 말했다. 공자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국방은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도 국가정책 중 최우선으로 고려됐다. 그리고 국가 최고지도자의 치적을 평가함에 있어서도 국방정책은 빼놓을 수 없는 부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李承晩)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보면 애국과 독재의 양면으로만 판단함으로써 건국 초기부터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지도자(war leader)로서의 업적을 간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대통령이 6·25전쟁 발발 전 국방장관과 군 수뇌부에 전쟁 경험이 없는 인사를 발탁, 개전 초기 대응에 혼란을 겪게 한 것은 군통수권자로서 잘못된 국정운영임에 틀림없다.

또 종전 후 1954년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하고, 국회에서 한 표 부족으로 부결됐는데 사사오입(四捨五入)의 해석논리를 변칙 적용해 번복, 통과시키고 60년 3월15일 선거에서는 마침내 정부·여당이 전국적·조직적으로 부정을 저질러 대통령에 4선됐으나 4·19 혁명으로 사임하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그러나 이대통령은 집단안보체제의 중요성을 인식,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해당하는 태평양지구 반공연맹을 결성하기 위해 필리핀의 키리노 대통령에게 공식 발기인이 되도록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고,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을 진해에 초청해 토의하기도 했다. 또 이대통령은 북한이 소련의 지원 아래 남침할 것을 예견하고 49년 미군 철수론이 대두했을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기울여 비록 미군 철수는 진행됐으나 한·미 군사원조협정 조인, 주한 미군사고문단 설치, 유엔 한국위원회의 군사감시단 조직 등의 성과를 거뒀다.

무엇보다 이대통령은 일관되게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북한의 침략 위험을 미국 조야(朝野)에 알림으로써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47년 당시 공산주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자유와 독립 유지에 노력하는 미국 외교정책의 원칙(트루먼 독트린)을 천명한 트루먼(Harry S Truman) 행정부가 신속히 미군 참전의 결단을 내리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또 전쟁의 와중에서 52년 1월18일 평화선을 선포해 한국의 어족 보호와 주권 선양이라는 업적을 남겼다. 53년 6월18일 이대통령의 단독조치로 반공포로를 석방해 한국이 주권국가임을 세계에 선양하는 한편 유리한 위치에서 휴전 후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에 관한 회담을 진행해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장기 경제원조, 한국 육군 20개 사단 확장과 해·공군 근대화 등의 약속을 받아내 막강한 국군의 기틀을 마련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트루먼 대통령 같은 전쟁 지도자가 없었다면 6·25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세계는 극동의 한 조그마한 신생국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여기고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도, 지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한반도의 공산화는 물론 아시아·태평양지역도 동구와 같이 붉게 물들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은 첨예화돼 제3차 세계대전 발발로 이어질 개연성도 컸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두 전쟁 지도자가 이끈 6·25전쟁의 승리는 ‘인류 공동의 적’이었던 공산주의의 종말을 가져오게 한 20세기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쟁기념관의 ‘한국전쟁실’에는 6·25전쟁에서 보여준 이승만 대통령과 트루먼 대통령의 전쟁 지도자로서의 면모와 미국의 6·25전쟁 참전 의미 등을 되새길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