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북한 공산군의 계획된 기습 남침으로 개전(開戰)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후퇴 외에는 속수무책인 전세를 반전시켜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의 신속한 참전이라고 하겠다.
미국은 개전 3일째인 6월27일 해·공군의 투입을 결정하고 28일에는 주일(駐日) 미 제5공군 소속 B-26 폭격기가 출격, 최초로 북한군을 공격했다. 그리고 7월1일 지상군 선발대가 부산에 도착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당시 미국 내 사정을 보면 군수산업은 빠른 속도로 평화산업으로 전환해 갔고 국방예산도 대폭 감축됐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군은 제대 열기에 휩싸여 있었고, 좋은 직장과 가정으로 돌아온 제대 군인들은 군으로 돌아가기를 꺼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단호하고 신속하게 참전을 결심한 데는 군사적 안목을 지닌 한·미 양국 대통령이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기습 남침을 보고받은 이승만(李承晩)대통령(재임 1948∼1960)은 한국의 운명은 오로지 미국의 지원 여하에 달려 있다고 믿고, 우선 극동에 대한 무정견(無定見)과 몰이해(沒理解)한 미국의 지도자들을 설득해 이 난국을 극복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대통령은 무초 주한 미대사와 맥아더 사령관에게 “미국 시민의 철수를 위해 미 해·공군을 사용하고 한국군에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는 정도로 이 긴급한 사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강조했다. 또 유엔본부·미 국무부 등에 한국의 위급한 사태와 함께 북한의 침략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임을 호소하는 능숙한 외교로 자유우방의 지원을 신속히 받을 수 있었다.
한편 휴가 중이던 트루먼(Harry S Truman) 미 대통령(재임 1945∼1953)은 북한의 남침 사실을 보고받은 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 북한의 전쟁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군대 철수를 내용으로 한 결의안을 제출토록 지시하고 급히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포병 소위로 참전한 바 있는 트루먼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의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며 공산침략을 자유세계의 힘으로 단호히 응징,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예방하고 나아가 유엔의 권위를 수호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6월26일 트루먼 대통령은 애치슨 국무장관이 건의한 38도선 이남에서 미군에 무기·탄약 지급, 7함대의 대만해협 파견을 즉각 시행토록 명령하고 맥아더 사령관에게 현지 시찰단을 한국에 파견할 것을 지시했다. 또 29일 한국군의 전면 붕괴가 목전에 이르렀다는 급보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부에 “해·공군을 파견, 한국군을 지원하라”는 긴급명령을 하달하고 30일에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휘하의 지상군을 한국에서 사용하는 전면적 권한을 부여했다.
이어 7월7일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군 총사령부 설치가 결의되자 트루먼 대통령은 즉시 맥아더 사령관을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이로써 미국과 유엔은 명실공히 6·25전쟁에 전면 개입하게 된 것이다.
운동경기에서 주전선수 한 사람의 역할이 경기의 승패를 좌우하듯 국가의 운명도 국가 최고 지도자의 역할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 중심국가에서 대통령은 그 나라의 구심점이자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존,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하는 책무를 지며, 그 책무를 완수하기 위해 국가원수·행정수반·군 총사령관의 지위를 갖는 것이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