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63>내가 겪은 6·25 (9)

화이트보스 2009. 5. 18. 20:18

제1話 溫故知新<63>내가 겪은 6·25 (9)

6월28일 새벽 8대의 인민군 전차대가 미아리 고개를 밀고 넘어왔다. 보병의 엄호도 받지 않은 채 돌진한 탱크 8대는 돈암동·창경원·동대문 일대를 으르렁거리며 휘돌아다녔다. 아직 인민군 본대가 서울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그러나 단지 8대의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육군본부 지휘부는 일종의 공황상태로 빠져들었다. 미아리 방어진지에 배치된 2, 3, 5, 7사단 병력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강 쪽으로 심야탈출하기 시작했다.

나는 육사 생도 때부터 청량리에서 서빙고로 가는 철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체 판단으로 소대원들을 이끌고 청량리로 갔다. 우리 연대는 모병(募兵)을 충청도에서 했기에 소대원들은 고향 사람인 나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철도원들은 화차에 맥주를 실은 기차를 끌고 북쪽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기관사에게 이미 적이 서울 시내로 들어왔으니 기차를 후방으로 돌리라고 말하고 척후병을 내서 열차를 유도하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기마병들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적의 기병인줄 알고 긴장했는데 알고 보니 서울시경 소속 기마경찰대였다. 기병은 전술적으로 기습·추격·포위 목적으로 운용하는데 당시는 아군과 인민군, 그리고 경찰이 모두 기병을 운용하고 있었다. 6월27일 서울 시내에 맨 먼저 들어온 것도 인민군의 기마정찰대와 탱크부대였다.

서울시경 기마대에 “한강으로 안가고 왜 이리로 오느냐”고 물어보니 “한강다리가 끊어져 건널 수가 없어 서빙고 나루터로 건너려고 오는 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서빙고 백사장 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가면 강남으로 차량과 달구지를 실어 나르는 바지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한강은 상류 쪽에서 마포 강변까지 수십 만 명의 피난민이 운집해 서로 먼저 배를 타려고 혈안이었다. 고작 몇 사람밖에 탈 수 없는 작은 배에 수십 명씩 매달리다보니 얼마 못 가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우리 소대원들과 민간인들이 뒤섞여 탄 나룻배도 무거워 뜨지 못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권총을 꺼내 하늘을 향해 몇 발 쏘며 “나는 육군 중위 이재전이다. 우리는 강을 건너가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니 민간인들은 하선하라”고 소리쳤다.

겁을 먹은 사공과 민간인들은 배를 내줬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죄책감이 든다. 우리는 사공에게 “강을 건너면 배를 돌려 올 테니 안심하고 맡겨라”고 말하고 강을 건넜는데 경황이 없어 인계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군 수뇌부는 한강다리를 조기 폭파함으로써 결과적으로 150만 명의 서울 시민뿐만 아니라 아군 약 5만 명, 그리고 아군의 수많은 차량과 중화기·탄약 등을 방치했다. 당시 강북에서 작전 중이던 국군 6개 사단은 퇴로가 차단되고 지휘체제가 붕괴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약 5만 명의 국군은 적의 전차대가 28일 새벽 1시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 시내로 들어오고 한 시간 반 뒤에 한강다리가 폭파되자 뿔뿔이 흩어져 필사적으로 한강을 건너게 된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때의 철수는 통신체제가 마비되고 지휘체제의 작동 없이 이루어진 오합지졸(烏合之卒)의 집단탈출이었다. 내가 속한 25연대를 포함해 거의 모든 병력이 부대의 건제(建制)를 유지하지 못한 채 소대 단위로 탈출했다.

‘한국전쟁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강 인도교 폭파로 한수(漢水) 이북에서 싸우고 있던 장병 가운데 4만4000 명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7사단의 경우 (약 1만 명 가운데) 장병 500명과 기관총 4정만 도강할 수 있었다. 1사단은 5000명만 도강하고 각종 대포는 유기됐다. 제2, 3, 5사단 역시 흩어진 채 도강했기 때문에 부대의 편제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