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60>‘한강교 폭파’ 책임 규명 군사재판

화이트보스 2009. 5. 18. 20:16

제1話 溫故知新<60>‘한강교 폭파’ 책임 규명 군사재판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의정부 반격작전이 실패해 의정부 방어선이 붕괴된 후인 6월27일 오전 1시에 소집된 비상국무회의에서도 채병덕(蔡秉德)총참모장은 ‘서울 사수’를 주장하며 “반격으로 전환해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것”이라고 호언했으나 신성모(申性模)국방부장관은 수원 천도(遷都)를 결정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당시 150만 명의 서울시민을 어떻게 하겠다는 대책은 강구하지 못한 채였다.

정부는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이 경무대를 떠나 대전으로 피난길에 오른 지 3시간 뒤인 6월27일 오전 6시 ‘수원 천도’ 사실을 발표함으로써 시민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사태가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됐다.

한편 의정부에서 철수한 제7사단과 증원부대인 제2사단 등은 우이동~창동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으나 이마저 27일 오전 10시쯤 무너졌다. 이렇게 되자 채총참모장은 신장관에게 서울 철수를 건의하고 각군 본부를 시흥 및 수원으로 이동한다고 천명했으나 전선부대의 철수문제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었다. 나 역시 창동 방어선을 지키다가 지휘체계가 무너진 부대의 소대원들을 이끌고 자력으로 후퇴를 결정해야 했다.

국군은 결국 28일 오전 1시쯤 북한군 전차의 미아리고개 진입을 허용함으로써 서울의 최후 방어선이 무너졌다. 채총참모장은 28일 오전 1시45분쯤 작전국장 강문봉(姜文奉·군영·중장 예편·작고)대령으로부터 북한군 전차의 서울 진입 사실을 보고받고 전방부대 지휘를 김백일(金白一·군영·중장 예편·작고)참모부장에게 맡긴 채 자신은 용산의 육군본부를 떠나 시흥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때 공병감 최창식(崔昌植)대령은 한강으로 이동, 대기하고 있던 폭파조에 명령해 28일 오전 2시30분쯤 한강 인도교와 3개의 철교를 폭파하고 오전 4시쯤 광진교도 폭파했다. 폭파 당시 한강 인도교 위에는 차량과 수많은 피난민이 엉켜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500∼800명이 희생됐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폭파작전에도 불구하고 2개의 철교는 완전히 폭파되지 않고 일부만 폭파됨으로써 며칠 뒤 북한군 전차의 도강을 허용하게 된다.

당시 한강에는 용산에서 노량진을 잇는 한강대교(인도교), 경부선(복선) 철교, 경인선 상하행선 철교, 광진교(인도교) 등 5개의 교량이 있었다. 한강교 폭파 당시 국군의 주력은 한강 이북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서울시민에 대한 대책도 전혀 강구되지 않은 상태였다. 한강교가 폭파되면 한강 이북의 국군 주력과 서울시민의 퇴로는 자동적으로 차단되게 돼 있었다.

전쟁 발발 만 3일도 채 안된 상황에서 적에게 수도를 내주고 한강교를 폭파한 사건은 후퇴하지 못한 국군 주력부대의 붕괴와 함께 150만 명의 서울시민이 적 치하에서 3개월을 신음하게 만들었다. 한강교가 폭파되자 건제(建制)가 붕괴된 국군은 야포·박격포·차량 등 주요 장비를 폐기하고 소총만 휴대한 채 나룻배를 이용, 소부대 단위로 도하하게 됐다. 이로 인해 개전 당시 10만여 명의 국군은 2만5000여 명으로 급감했다.

결국 한강교 폭파의 책임 문제가 대두되고 이를 규명하기 위한 군사재판이 부산에서 열렸으나 신장관·장경근(張暻根)국방부차관·채총참모장 등 수뇌부가 “한강교 폭파를 지시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는 바람에 최창식 공병감이 모든 책임을 지고 50년 9월21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유족들이 62년 재심을 청구, 최 전 공병감의 무죄가 확정됨으로써 그는 명예를 회복하게 됐다. 따라서 한강교 폭파와 관련해 실질적인 책임자는 없는 셈이다. 그러나 국가의 전쟁지도를 책임진 국방부장관·총참모장이 전방에 배치된 군과 150만 서울시민의 생사가 걸린 사건을 명확하게 조치하지 않은 직무유기의 책임은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