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59〉내가 격은 6·25 -5-

화이트보스 2009. 5. 18. 20:16

제1話 溫故知新〈59〉내가 격은 6·25 -5-

수도가 적에게 함락되는 것은 전쟁의 패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최후까지 수도를 지키는 것이 일반적인 전쟁 지도(指導)의 지침이었다. 그래서 전쟁 발발 전은 물론 발발 후에도 신성모(申性模)국방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서울 사수는 말할 것도 없고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그런 무비유환(無備有患)의 허풍은 서울 사수는커녕 오히려 나중에 일부 인사들에게 북침설의 오해 근거를 제공했을 뿐이다.

6·25전쟁 발발 직전 또는 직후에 제기된 서울 사수론은 피아의 전력이나 지리적 여건 등을 면밀히 분석한 전략적 판단에 의해 도출된 결론이 아니었다. 그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적 수사(修辭)로 공표한 “북한이 남침시에는 반격으로 전환해 통일의 호기로 삼는다”는 전쟁지침을 수행하기 위한 첫 번째 요소가 서울 사수였기에 나온 결론이었다.

이에 따라 전쟁 발발을 전후해 한국의 전쟁지도부가 채택한 방어전략 핵심은 자연스레 서울을 사수하는 것이었다. 서울 사수를 위한 구체적 조치는 후방(서울·대전·광주·대구)에 있는 4개 사단을 서울 북방에 증원, 적의 위협을 격퇴하는 것이었다.

한편 남침하는 북한군은 국군이 후방의 4개 사단 등 가용전력 대부분을 서울 북방에 증원, 서울 방어에 주력할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북한군은 전쟁 초기에 국군의 주력을 격멸하기 위해 제1군단을 서울 북방에서 공격케 하고 제2군단을 춘천~수원 방향으로 진출케 함으로써 ‘국군의 주력을 한강에서 포위, 격멸한 후 부산을 향해 진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역사의 결과를 가정(假定)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지만 교훈적 측면에서 만약 국군이 당시 의도대로 의정부 방어에 성공한 반면 춘천 축선에서 실패, 북한군이 수원을 차단했다고 가정한다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됐을까.

그러나 그같은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개전 초기 상황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북한군이 그들의 계획(서울 포위)을 구현하기 위해 의정부 축선에서 의도적으로 진출을 지체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국군 제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의 선전으로 조공(助攻)부대인 북한군 제2군단이 춘천을 돌파, 수원으로 진출하려는 계획이 좌절됨으로써 한강 이북에서 국군의 주력을 포위·격멸하려던 북한군의 전략은 실패했다.

한편 이같은 북한군의 의도를 전혀 예상치 못한 한국의 전쟁지도부는 대통령의 서울 사수 지침에 따라 후방지역의 가용전력을 모두 서울 북방에 투입했다. 피아의 전력과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 수립된 전략이라기보다 밀려오는 홍수를 막기 위한 임기응변의 방책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의정부로 달려간 채병덕(蔡秉德)총참모장은 6월25일부터 27일 창동방어선까지 7회에 걸쳐 현장을 지도했다. 오로지 의정부 축선에 나라의 운명을 걸고 있었던 셈이다.

이와 같은 당시의 긴박성으로 인해 의정부지역에서는 대대 단위의 축차(逐次) 투입으로 의정부 축선의 반격작전이 감행됐다. 나 역시 그때 온양에서 의정부전선에 긴급 투입됐다.

그러나 전쟁지도부는 후방지역에서 도착한 부대들이 제대로 건제(建制)를 갖추기도 전에 도착 순서대로 축차 역습을 감행했다. 이들의 역습은 마치 ‘삽으로 뜬 흙으로 홍수를 막는 격’이었다. 결국 의정부 축선에서의 반격작전은 용병술의 실패였다.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2003.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