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건군(建軍)의 모태인 국군조직법이 법률로 확정·공포된 것은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난 후인 11월30일이었다. 이에 따라 12월15일 제1대 육군 총참모장에 건군의 대부(代父)인 이응준(李應俊·군영·중장 예편·작고)소장이 임명됐다. 이때부터 육군은 비로소 조직체계를 정비하게 됐다.
그러나 가난한 신생 독립국가의 빈약한 재정과 인적자원으로는 군의 전력증강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38도선에서는 쌍방간 충돌이 빈번히 발생해 국지전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또 후방에서는 무력폭동이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말하자면 국군 지휘부가 구성되자마자 준(準)전시상태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앞에서 얘기했듯 이 와중에 춘천에 주둔한 제8연대 제1대대장 표무원(表武源·육사2기)소령과 홍천에 본부를 둔 같은 연대 제2대대장 강태무(姜泰武·육사2기)소령이 대대병력을 이끌고 집단월북을 감행함으로써 49년 5월8일 이응준 총참모장이 지휘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창군의 기틀을 잡아야 할 초대 총장의 재임기간이 5개월이 채 못됐다.
군 원로인 57세의 이응준 총장이 물러나자 제2대 총참모장에 34세의 채병덕(蔡秉德·군영·중장 예편·전사)소장이 보직돼 육군은 세대교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병덕 총장도 원로 그룹인 김석원(金錫源·육사8-1·소장 예편·작고)1사단장과의 불화로 49년 9월30일 퇴진함으로써 그의 재임 기간 역시 6개월이 채 못됐다.
이어 제3대 총참모장에 신응균(申應均·특임·중장 예편·작고)소령의 부친으로 57세의 원로인 신태영(申泰英·특임·중장 예편·작고)소장이 부임했으나 그 또한 50년 4월9일부로 물러났다. 재임 기간 6개월. 원로 그룹의 총참모장이 물러가자 이번에는 또다시 35세의 채병덕 소장이 50년 4월10일 제4대 총참모장에 부임했다.
채소장이 제4대 총장으로 취임할 당시 육군본부 참모 편성은 ▲작전참모부장 정일권(丁一權·군영·대장 예편·작고)준장 ▲인사국장 강영훈(姜英勳·군영·중장 예편)대령 ▲정보국장 장도영(張都暎·군영·중장 예편)대령 ▲작전교육국장 강문봉(姜文奉·군영·중장 예편·작고)대령 ▲군수국장 양국진(楊國鎭·군영·중장 예편·작고)대령이었다.
그런데 채총장은 취임 직후인 4월22일 정일권 준장을 도미 유학차 해임하고 제3사단장 김백일(金白一·군영·중장 예편·작고)대령을 작전참모부장에 기용했다. 또 제3사단장에는 유재흥(劉載興·군영·중장 예편)준장의 부친인 유승렬(劉昇烈·육사 8-1·소장 예편·작고)대령, 제1사단장에 백선엽(白善燁·군영·대장 예편)대령, 제5사단장에 이응준 소장을 보임했다.
이어 군은 전쟁 발발 2주 전인 6월10일 건군 이후 최대 인사라고 할 수 있는 5개 사단장과 육본의 2개 국장에 대한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이로써 육군은 4월22일자 인사까지 합할 경우 사실상 모든 육본 참모와 사단장을 바꾼 것이다.
국군조직법 제정으로 이응준 소장이 제1대 총참모장에 보임된 48년 12월15일부터 전쟁 발발 전까지 20개월 동안 육군 총참모장 4명이 부임했다. 평균 임기는 5개월. 일선 사단장의 평균 재임 기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처럼 인사이동이 잦은 것은 신생 독립국가의 혼란한 상황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대규모 인사이동 이후 15일 만에 전쟁이 발발한 결과론의 시각에서 볼 때 ‘과연 적의 위협을 목전에 두고 그같은 대규모 인사가 필요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