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55〉내가 겪은 6·25 -1-

화이트보스 2009. 5. 18. 20:14

제1話 溫故知新〈55〉내가 겪은 6·25 -1-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현 한자교육진흥회장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나는 일선 부대 보병 소대장(중위)이었다. 그 시절 소위·중위는 흔히 ‘총알받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53년 7월 대대장(소령) 시절에 휴전을 맞이했다.

초급장교 시절이었기 때문에 내가 겪은 6·25는 한계가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더라도 당시 참전했던 다른 선임장교들의 경험담과 나중에 내가 사단·군단을 지휘하면서 뒤늦게 느낀 생각과 전사(戰史)를 보태서라도 6·25의 교훈을 남겼으면 한다.

50년 6월24일 토요일 오후부터 육군본부 당직 상황장교는 사관학교 동기인 정보국의 김종필(金鍾泌·육사8기·준장 예편)중위와 작전국의 조병운 대위였다. 25일 오전 4시쯤 38도선 전역에서 북으로부터 포격이 시작되자 전선의 각 부대는 즉각 육군본부에 보고했다.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이날 오전 2시쯤 귀가해 취침 중 당직사령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게 된다. 채총참모장은 상황장교 김종필 중위를 자택으로 불러 자세한 상황을 확인한 다음 “현 시간부로 전군에 비상을 발령하고 각 국장을 소집하라”는 구두명령을 하달했다

채총참모장은 즉각 국방부장관 공관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자 장관 비서실장을 앞세워 국무총리 공관인 마포장(麻浦莊)으로 달려갔다. 그때까지 신성모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은 취침 중이었다. 신장관은 가운을 입은 채 채총참모장이 휴대하고 간 상황판으로 남침 사실을 보고받았다. 이때가 오전 7시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요일에 경회루의 비원 연못에서 낚시질을 하곤 했다. 6월25일에도 이대통령은 비원으로 나가 낚시하면서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오전 10시쯤 경무대(景武臺) 경찰서장 김장흥(金長興)으로부터 남침 상황을 최초로 보고받고 경무대로 돌아와 비서관들로부터 좀 더 소상한 보고를 받았다.

채총참모장으로부터 전쟁상황을 보고받은 신장관은 허둥지둥 청와대로 향했다. 비원에서 청와대로 돌아온 이대통령이 신장관을 처음 만난 것은 오전 10시30분쯤이었다. 그런데 신장관은 이 다음과 같은 요지로 엉터리 보고를 하면서 호언(豪言)했다.

“적이 38도선을 넘어 남침하고 있으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각하의 신금(宸襟)을 어지럽혀 드린 일은 송구스럽기 짝이 없으나 충용무쌍(忠勇無雙)한 국군은 적을 격퇴, 수일 내에 북한을 수복해 보일 것입니다.”

오전 11시쯤에는 신총리서리가 주재하는 비상국무회의가 열렸다. 이어 오후 2시에는 대통령 주재 비상국무회의가 열렸다. 이때의 전선상황은 개성 함락(25일 오전 9시30분), 의정부 함락(26일 오후 1시) 등 비관적 상황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장관과 채총참모장의 보고는 “후방사단을 진출시켜 적을 격퇴할 수 있다”느니, “통일의 호기이다”느니 하는 허풍으로 일관했다.

신총리서리로부터 전쟁상황을 보고받은 이대통령은 이때까지도 전쟁 경험이 없는 신장관의 보고를 액면 그대로 믿고 상황을 낙관하고 있었다. 특히 작전 초기 서울 외곽에서 전투가 전개되고 있던 6월27일 오전 3시부터 대구를 경유해 다시 대전으로 돌아오는 12시간 동안은 대통령과 최소한의 통신대책마저 강구하지 못한 채 국가원수의 유고(有故)상황이 연출됐다.

나는 실제로 서울 창동·미아리 전투에서 적에게 패한 뒤 소대원을 이끌고 후퇴하는 길에 국방부장관·총참모장 일행과 마주친 적이 있다. 그때 신장관은 초급장교인 내게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며 통사정했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대통령의 역할이 없었던 것이다.

2003.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