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53〉김홍일 장군 -中-

화이트보스 2009. 5. 18. 20:13

제1話 溫故知新〈53〉김홍일 장군 -中-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채병덕(蔡秉德·군영·중장 예편)총참모장은 김석원(金錫源·육사8-1·소장 예편)전 1사단장의 채근에 아무 말도 못했다. 김석원 장군은 한층 소리를 높이더니 뒤에 배석하고 있는 육군본부 참모들을 향해 “참모부장 김백일(金白一·군영·중장 예편)대령·작전국장 장창국(張昌國·군영·대장 예편)대령, 후방에 있던 3개 사단은 지금 어디에 있나”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그들도 대답을 못했다. 병력은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병력이 오는 대로 ‘위급하다’는 곳으로 보급품 배급하듯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전투경험이 많은 원로 장성은 이러한 상황을 알고 암담했다. 애당초 김홍일·이형근 장군이 그토록 3개 사단의 집중 운용을 채병덕에게 건의했건만 보병 3개 사단을 집중 운용하지 않고 분산시킨 것이다. 이러한 소동 속에서도 주최측인 신성모·채병덕·김백일·장창국 등은 이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신성모는 상선의 선장 출신이고 다른 세 사람은 일본·만주군 출신이지만 모두 전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부서에서 일해 전쟁에 대해서는 문외한(門外漢)이었다.

이윽고 김홍일(金弘壹·특임·중장 예편)장군이 일어나 말문을 열었다.
“일전에 총참모장께 대전·광주·대구에 있는 3개 사단을 전쟁 발발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전방 지역에 미리 갖다 놓을 것을 건의한 바 있습니다. 이는 저의 첫째 방책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책으로 어제 다시 3개 사단을 한강 방어선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전개시키고 한강 이북의 모든 부대를 강남으로 철수케 해 재정비한 다음 반격작전을 실시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채택이 안됐습니다. 첫째 방책보다 둘째 방책이 차선책(次善策)입니다.

셋째 방책은 그보다 못한 최후의 방책이 될 것입니다. 이는 대한민국과 국군을 위해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중략)…결론을 말씀드리지요. 때는 늦었습니다. 호기(好機)도 지났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부터 수도 사수만을 고집, 아까운 병력을 뭉텅뭉텅 소모시킬 게 아니라 즉시 한강을 방어선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그 다음 후방부대 병력과 학생들을 동원, 한강 남안에 진지를 구축케 하는 한편 시민들을 한강 이남으로 철수시키고 효과적인 지연전으로 병력을 철수, 한강선을 방어해야 합니다. 한강을 방어하는 동안 후방에서 우리의 역량을 키워 반격준비를 하는 한편 미군의 개입을 요청, 연합군을 편성해 북진합시다.”

김홍일 장군의 열변이 끝나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이범석·김석원 장군은 “김홍일 장군의 한강 방어선 설정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면서 “지금 상황 하에서 최상의 수단은 한강 방어뿐”이라고 김장군의 전략에 동의했다.
그러나 채병덕 총참모장은 도저히 안되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일어나 반론을 제기했다.

“김홍일 장군의 방책이 훌륭한 방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저도 그 방책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각하의 명령은 서울 사수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몸을 바쳐 서울을 사수할까 합니다.”
그러자 신성모 장관도 “채장군 말대로 서울은 사수해야 한다. 대통령 각하의 명령이다. 우리 모두 죽는 한이 있어도 서울을 사수하자”고 거들었다.

채병덕 총참모장의 ‘서울 사수’ 고집과 ‘3개 예비사단 축차 투입’으로 김종오 대령의 제6사단을 제외하고 국군의 모든 사단은 궤멸 상태에 빠졌다. 달리 수습방책을 찾지 못하며 혼돈을 거듭하고 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마지막 처방’으로 한강 방어를 주장하던 김홍일 장군을 6월28일 낮 12시 국군 사단이 완전히 와해된 시간에 단 하나의 건제(建制)를 유지한 사단도 없는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했다. 천혜의 장애물인 한강을 이용, 국군을 수습하고 그 선에서 적을 막아야 하는 대임(大任)을 부여한 것이다.

2003.07.12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 dangkim@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