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 <54> 김홍일 장군 (下)

화이트보스 2009. 5. 18. 20:14

제1話 溫故知新 <54> 김홍일 장군 (下)

김홍일(金弘壹·특임·중장 예편)장군은 1898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장군은 1918년 3월 오산학교를 수석 졸업하기까지 이승훈·조만식 선생의 훈도(薰陶)로 민족적 사명감에 불타는 애국청년으로 성장했다. 장군은 오산학교 졸업 후 이승훈의 권유로 경신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으나 비밀결사조직 혐의로 모진 고문을 받은 것을 계기로 1918년 중국 망명을 결행했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신규식·여운형 등 독립운동 지도자, 중국 혁명가들과 교류하게 된 장군은 이듬해 구이저우(貴州)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군 장교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3·1운동의 영향으로 만주·노령지역에서 독립군 항전이 치열히 전개되자 장군은 이에 동참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하여 1920년 11월 중국군에서 나와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간 장군은 법무총장 신규식·군무총장 노백린 등을 만나 독립군에 투신할 결심을 밝히게 된다.

김홍일 장군은 이봉창 의거의 실패를 거울 삼아 김구(金九) 주석의 요구에 따라 포탄창 주임 왕백수에게 도시락과 물통 폭탄을 만들게 했다. 이것이 완성된 뒤 김구 주석을 모시고 병공창에서 시험까지 해 완벽한 폭탄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1932년 4월29일 상하이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天長節 :日王의 생일) 기념식에서 윤봉길(尹奉吉) 의거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제스(蔣介石)중국 총통은 이 의거를 “중국의 100만 대군이 못하는 일을 한국의 한 의사(義士)가 능히 하니 장하다”고 격찬했다.

중국군에서 사단장으로 소장 계급까지 달았던 광복군 참모장 김홍일 장군은 광복 후 1948년 8월 귀국해 국군에 입대,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육군참모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6·25전쟁을 맞았다. 김장군은 당시 우리 국군에서는 사단급 이상 부대를 지휘한 경험이 있는 유일한 원로장성이었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러한 인재를 총참모장이나 국방부장관에 임명하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는 한가한 직책인 참모학교장에 보임한 것은 불운이었다.

6월28일 서울이 떨어지고 국군 사단이 완전히 와해된 시점에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시흥사) 사령관을 맡게 된 김홍일 장군은 한강을 도하, 철수하는 국군 장병들을 한데 모아 제7사단을 중심으로 한 혼성7사단, 수도사단을 중심으로 한 혼성수도사단, 2사단을 중심으로 한 혼성2사단 등 3개 사단을 임시 편성해 안양천에서 광진교에 이르는 한강 남안 24㎞에 대한 방어작전에 돌입했다.

김홍일 장군의 재편성 계획에 의해 편성 완료된 시흥사 예하의 한강 방어부대는 ▲이종찬 대령이 지휘하는 혼성수도사단 5개 대대 ▲유재흥 준장이 지휘하는 혼성7사단 6개 대대 ▲이준식 준장이 지휘하는 혼성3사단 5개 대대 ▲백선엽 대령이 지휘하는 제1사단의 일부 부대 등이었다.

그런데 혼성사단은 말이 사단이지 병력은 연대 수준이요, 화력은 연대별 박격포 2∼3문, 기관총 5∼6정에 지나지 않았으며 탄약 또한 부족한 상태였다. 더욱이 통신장비 부족으로 상급부대는커녕 인접부대와의 교신도 어려워 협조된 작전이나 일사불란한 방어작전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상태였으며 오직 야전지휘관과 애국심에 불타는 장병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홍일 장군이 이끄는 시흥사는 오합지졸(烏合之卒)의 혼성부대를 효과적으로 운용, 일주간이나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미군이 한반도에 부대를 전개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고 이후 지휘 축선을 간명화하기 위한 국군 최초의 군단 재편성 및 창설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재전 예·육군중장·前전쟁기념사업회장·現한자교육진흥회장 >

2003.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