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話 溫故知新〈51〉김석원 장군 -下- | |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중일(中日)전쟁 당시 일본군 대대장으로 중국군 1개 사단을 섬멸하는 신화를 남긴 김석원 장군이지만 6·25전쟁 당시 무용담(武勇談)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진천 전투다. 문안산·봉화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벌인 진천 전투는 6·25 개전 이후 계속 무인지경을 달리듯 남진(南進)만 해온 공산군이 최초로 국군에 의해 저지돼 퇴각한 전투였다. 육군본부는 당시 한·미 간의 전선 조정을 위해 수도사단이 인민군 제2사단의 진출을 3일 동안만 진천에서 저지해줄 것을 희망했는데, 수도사단이 7일 동안이나 이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격전 중 부임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휘관으로서 진가를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인민군 제2사단장 최현은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던 그들의 진격이 진천에서 저지되자 혼잣말처럼 “그놈과 또 만나 이 꼴이 됐군. 그놈은 교묘히 병사들을 휘어잡는단 말이야”라고 불평을 털어놓았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최현은 6·25전쟁이 나기 전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도 당시 제1사단장이던 김석원 장군과 맞붙어 곤욕을 치른 경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군단의 좌우측 전선이 모두 남하함에 따라 수도사단도 전선의 균형 유지를 위해 청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김석원 수도사단장은 처음에 철수하지 않겠다고 완강히 버텼다. 미군들이야 싸우다가 불리하면 대구·부산을 거쳐 바다 건너 저희 나라로 가면 그만이지만 그로서는 내 나라, 내 땅을 죽음으로 사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눈물을 머금고 철수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 군단 지휘소에서 청주 고수 여부에 대한 군단 작전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군단장 김홍일 소장, 수도사단장 김석원 준장, 육본 작전참모부장 김백일 대령, 각 연대장과 관계 참모들이 참석했다. 그리고 7월12일 육군본부는 1군단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2군단을 창설하고 같은 날짜로 준장에 진급한 김백일을 군단장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한국군은 2개 군단과 1개 직할 사단으로 지휘체계를 정비하고 미군이 급히 계획한 금강 방어선과 연계해 새로운 전선 형성에 임하게 됐다. 그리하여 7월14일부로 국군의 작전지휘권은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에게 이양됐다. 이후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리면서 안강·기계까지 적의 수중에 다시 들어가게 됐다. 아군은 기계의 중요성을 인식해 미군의 전차와 포병을 지원, 기계를 공격해 재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4차에 걸친 쟁탈전 끝에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래서 육군본부는 기계 재탈환을 독전(督戰)했음에도 끝내 실패하자 9월1일 제1군단장에 김백일 준장, 수도사단장에 헌병사령관이던 송요찬 대령을 보직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김석원 준장은 후일 그의 저서 ‘노병의 恨’에서 이 전시(戰時) 인사에 대해 “아연실색했다”고 표현했다. 아마도 그는 김홍일 소장 같은 노련한 야전지휘관을 아무런 사전연락도 없이 한직인 종합학교장으로 전보한 데 대해 자신의 오랜 전투경험에서 쌓은 눈으로 보고 군의 장래를 생각하고 우려한 것 같다. 김석원 장군은 자신의 인사에 대해서는 “부하도 책상도 없는 특명검열단장”이라고 표현했다. 신임 김백일 군단장과 김석원 사단장 사이가 물과 기름처럼 겉돌아 군단 지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사단장도 교체한 것으로 간주됐다. 김석원 장군은 1956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했다. 그 뒤 그는 오직 육영사업에 몸과 마음을 바치다가 1978년 8월6일 향년 85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2003.07.07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 dangkim@empa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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