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49〉김석원 장군

화이트보스 2009. 5. 18. 20:12

제1話 溫故知新〈49〉김석원 장군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내가 김석원(金錫源·육사8-1기·소장 예편)장군을 먼발치에서나마 처음 본 것은 일제 치하인 1930년대 충남 천안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일본은 당시 정책적으로 한국인을 순화하기 위해 시국강연을 장려했는데, 그때 중국에서 명성을 날린 일본군 대좌였던 김석원 장군이 무공담을 들려줬다.

유년학교 4년을 마치고 1913년 일본 육사27기로 입교해 1917년 소위로 임관한 김석원은 위관 시절에는 승진이 다소 늦었으나 좌관(佐官·영관) 시절에는 승진이 빨라 1934년에 소좌, 1940년에 중좌, 1944년에 대좌로 승진했다. 그는 비록 일본군에 있었지만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만주지방으로 출동해 마점산군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림으로써 거금 700원의 승전상금을 받기도 했다. 이 돈은 뒷날 원석학원 창설의 자본금이 됐다. 김장군은 교육의 불모지인 이태원에 이태원 초등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가 중좌일 때 김석원 대대는 중일전쟁 초기 중국군 1개 사단을 섬멸하는 신화를 남기기도 했다. 8·15 광복 뒤 이승만 대통령과 장제스(蔣介石)총통이 진해 별장에서 회담할 때 이대통령이 “건군 초기의 우리나라에는 지휘관이 부족해서 걱정입니다”라고 말하자 장총통이 “아, 한국에는 김석원이라는 용감한 군인이 있지 않소”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김석원 대대가 중국군 1개 사단을 섬멸할 때 일본인 종군기자가 원고를 손에 쥐고 전사하자 다른 사람이 이 원고를 일본·중국의 신문에 보내 대서특필하게 됨으로써 김석원 중좌는 한·일·중에 널리 알려져 일약 ‘전쟁영웅’이 됐다. 이런 일로 하여 그는 조국이 광복되는 그날까지 일본군에서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지냈다.

김석원 장군은 그때 “진짜 장군 노릇하려면 김부대로 오라”고 호언할 정도로 무공이 뛰어나 일본 최고 무공훈장인 금지(金 至鳥)훈장을 받았는데, 한국인이 금지훈장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물론 그로 인해 친일 낙인이 찍히기도 했지만 전쟁 유공자라는 무공 덕분에 일제로부터 사립 성남고 설립 허가를 받아 육영사업을 통해 민족운동에 헌신하기도 했다. 또 그 때문에 성남고 출신들이 사관학교에 많이 입교하기도 했다.

나는 사관학교에 입교해 김석원 장군을 두 번째로 만났다. 이번에는 어릴 적 선망의 대상이었던 ‘금지훈장에 빛나는 일본군 대좌’가 아닌 ‘동기’로서 만났다. 물론 말이 동기지 8기 1차로 곧바로 대령으로 특별임관한 경우여서 소위로 임관한 우리 진짜 동기와는 천양지차가 있었지만.

김석원 장군은 일본 군인이 된 것을 반성하는 뜻에서 건군 대열에는 처음에 여러 선후배가 권유했지만 참여하지 않다가 6·25전쟁 직전에 특임으로 임관, 1사단장으로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 ‘육탄 10용사’의 신화를 남기고 군을 떠났다. 6·25전쟁이 터지자 그는 학도의용군을 모집하다가 다시 군복을 입고 수도사단장·3사단장·전시 검열단장을 지냈다.

내가 세 번째로 김석원 장군의 풍모를 곁에서 지켜본 것은 6·25전쟁 때였다. 그때 내가 목격한 바로는 6·25전쟁이 일어나 한강 방어선이 뚫렸는데 김장군은 채병덕(蔡秉德·군영·중장 예편·작고)장군의 참모와 내분이 있어 예편해 무보직 상태였다.

그런데 6·25전쟁 초기 초야에 묻혀 피난길에 올랐던 김석원 장군은 전세가 위기로 치닫게 되자 현역으로 복귀,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해 싸웠다. 다들 전쟁이 나면 도망갈 판인데 그는 경기도 시흥에 있는 김홍일(金弘壹·특임·중장 예편·작고)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을 찾아가 “전쟁이 났는데 내가 조언해줄 게 없을까 해서 찾아왔다”고 말한 진짜 군인정신의 소유자였다. 나는 당시 중위 계급장을 달고 연대장의 명령 수행차 시흥에 갔다가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2003.07.02 정리:김당 오마이뉴스기자 dangkim@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