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중위였던 나는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2사단 휘하의 25연대 소속으로 온양에서 곧바로 의정부 전선으로 투입됐다. 사단장은 이형근(李亨根·군영·대장 예편)대령, 연대장은 김병휘(金炳徽·군영·소장 예편)중령이었다.
이응준(李應俊·군영·중장 예편·작고)장군의 사위이자 대한민국 국군 ‘군번 1번’으로 유명한 이형근 장군의 군번 1번은 ‘조선경비대 입소 선착순 1번’을 의미했다. 6·25전쟁 발발 당시 2사단장, 정전 직전에 1군단장을 역임해 나는 전시(戰時)에 옆에서 지켜볼 기회가 많았는데, 전시의 젊은 나이에 별을 달아서 그런 지 ‘독불장군’이라는 칭호가 어울렸다.
6·25전쟁 초기에 첫 부인을 사별한 이장군은 당시 젊은 나이에 정전회담 대표로 왕림하면서 대표단에 꽃다발을 준 아가씨와 재혼했다. 당시 전선에서 이장군이 이 꽃다발 아가씨를 사단장 지프차 앞에 앉혀 별판을 벗긴 채 태우고 다닌 기억이 남아 있다. 특히 정전 직전의 1군단장 관할의 동해안은 군정(軍政) 하에 있었는데, 이장군은 별명이 나폴레옹으로 통할 만큼 동해안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성깔도 있어 입바른 소리도 잘하는 스타일이었다. 정전 이후 1956년에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창군 원로인 이형근 장군은 자신의 자서전 ‘군번(軍番) 1번의 외길 인생(人生)’에서 “6·25 당시 육군 지휘부에 통적분자(通敵分子)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6·25 초기의 ‘10대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제기한 바 있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전후해 발생한 일련의 문제점들에 대해 “적과 내통하지 않았다면, 정상적인 방어태세 하에서는 결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는 인식 하에 이장군이 제기한 10대 불가사의의 요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1)일선 부대의 남침 징후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했다는 점 (2)6·25 발발 2주 전에 단행된 각급 주요 지휘관의 대규모 인사이동 (3)6월13∼20일에 단행된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 (4)6월11일부터 계속된 비상경계령을 6월23일 자정에 해제한 점 (5)육본이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전 장병의 2분의 1을 휴가 및 외출·외박을 시킨 점 (6)육군 장교클럽 댄스파티가 6월24일 밤에 열린 점 (7)병력을 서울 북방에 축차(逐次) 투입해 장병들의 불필요한 희생을 가져온 점 (8)6월25∼27일 중앙방송이 국군이 반격, 북진 중이라고 허위방송을 한 점 (9)아군의 한강교 조기폭파 (10)공병감 최창식 대령에 대한 조기 사형집행. 이처럼 6·25전쟁 초기에 발생한 10가지 의문점을 10대 불가사의로 명명한 이형근 장군은 “언젠가는 누군가가 이 의문점에 대한 확증을 제시할 것으로 믿는다”면서 “바로 그런 증언이야말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도 긴요한 일”이라고 회고록에 적고 있다. 실제로 이형근 장군이 제시한 10가지 의문점에 대해서는 6·25전쟁을 접해본 사람이면 누구라도 의문을 품을 만한 내용임에 틀림이 없다.
특히 육군의 실병력을 지휘하는 최대 단위가 사단인데 전쟁 발발 2주 전에 사단장을 교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사단장들이 부대를 통솔 장악도 하기 전에 참전해 곳곳에서 파행을 빚게 했다. 또 서울 시민과 병기물자를 둔 채 한강다리를 폭파하는 실책을 범했지만 ‘죄 없는’ 공병감에 대한 사형을 조기 집행함으로써 책임소재를 명확히 가릴 수 없게 만들었다. 바로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군 내부에서는 필경 군 수뇌부가 공산분자와 내통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