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현 한자교육진흥회장
6·25전쟁 발발 전에 남북한은 군사력뿐만 아니라 정보력에서도 차이가 컸다. 당시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다량의 전차를 도입하는 등 남침 준비에 박차를 가한 결과 1949년까지 근소한 우위에 머물렀던 전투력 수준이 50년부터 남한과 견줄 수 없는 수준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됐다. 또 북한은 ‘국군은 대전차 방어대책을 전혀 강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등 아군의 취약점까지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반면 남한의 지도자들은 북한의 전력증강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확신을 가지고 대비책을 강구하지는 못했다. 그 중요한 배경에는 당시 모든 정보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주한 미 군사고문단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이들은 “미국이 현재처럼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 한반도에서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정치적 판단에 근거해 전선에서의 군사적 움직임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49년 봄부터 38도선 일대에서 시작된 남북한의 군사적 충돌은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또 49년 말부터 북한군이 남침할 것이라는 풍문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50년에 들어서는 2, 3, 4월 위기설이 분분했다. 그리고 이같은 위기설에 따라 육군은 그때마다 대기태세 또는 경계태세를 반복했다.
이에 따라 4월1일 이후 대기령·경계령이 발령되지 않았던 기간은 4월1∼6일, 5월4∼8일, 6월3∼10일 등 총 19일에 불과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비상경계령을 발령해야 할 사건이 수시로 발생했기 때문에 군은 계속된 비상경계령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너무 장기간 계속되는 비상경계령은 실효성이 없었다.
따라서 군은 비상경계령을 적당한 시기에 풀어 주고 다시 발령하는 행정조치를 반복하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6월11∼23일은 북한군이 38도선상의 계획된 공격대기 지점을 점령하고 공격준비를 완료하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38도선 일대의 국군 부대들도 북한군의 이상징후를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육군본부는 제7사단(의정부) 등 전선으로부터 이상징후에 대한 보고가 계속되자 6월24일 오후 3시 채병덕(蔡秉德)총참모장을 비롯한 일반참모들이 긴급회합을 갖고 비상경계령의 재발령과 휴가병력 복귀 등의 문제를 협의했다.
그러나 이날 회의에서는 정찰대를 포천·동두천·개성 등지에 파견, 적정(敵情)을 확인한 후 다음날인 6월25일 오전 8시까지 보고하도록 지시하는 수준의 조치에 그쳤다.
한편 6월24일 밤에는 육군본부의 장교구락부 개관식이 열렸다. 국군은 지난 2년간에 걸쳐 계속된 공비토벌작전과 잦은 비상경계령으로 인해 심신이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행사는 비상경계령이 해제된 가운데 채총참모장을 비롯한 수도권의 사단장과 육군본부의 주요 참모, 그리고 미 군사고문단 요원 등이 참석, 성대하게 거행됐다. 파티는 오후 10시가 넘어 끝났다. 물론 채총참모장을 포함해 일부는 늦은 시각까지 ‘2차’를 했다. 한마디로 말해 육군 수뇌부와 장교단은 작취미성(昨醉未醒)인 채 전쟁을 맞은 것이다.
결국 6월24일 0시의 비상경계령 해제조치는 6월11일부터 계속된 비상경계령을 풀어 주어 일정시간 휴식을 취한 후 다음 단계의 대비를 위한 조치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전쟁 발발 당일의 전투준비태세에는 커다란 허점이 생기고 말았다.
전쟁이 발발한 당일 국군의 61개 대대 중 240km에 달하는 38도선 전방진지에 배치된 부대는 불과 11개 대대로 1개 대대의 책임지역은 평균 22km 내외였다. 게다가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자 그동안 밀려 있던 휴가·외박을 허용함으로써 6월25일 아침 영내의 병력은 보직 병력의 2분의 1에서 3분의 2 수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