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62>내가 겪은 6·25 (8)

화이트보스 2009. 5. 18. 20:17

제1話 溫故知新<62>내가 겪은 6·25 (8)

인민군 탱크의 위세에 눌려 미아리까지 밀린 아군은 미아리~회기동을 잇는 서울 최후 방어선을 구축, 대치했다. 7사단(의정부)은 물론 내가 소속한 2사단(대전)·3사단(대구)·5사단(광주) 병력이 모두 전선에서 철수하는 병력과 함께 방어진지를 편성, 미아리 전선에 투입됐다.

6월27일 오후 북한군의 기마 정찰대와 함께 10여 대의 전차가 수유리 방면에서 미아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선에 온 군 수뇌부는 “내일 아침이면 미국 공군기 100대가 지원될 것이니 그때까지만 버텨라”고 간청하다시피했다. 아군은 사력을 다해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려 했으나 전차를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결국 28일 새벽 1시쯤 북한군 전차 2대의 미아리 고개 진입을 허용함으로써 서울 최후 방어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인민군 주력이 집중된 의정부~서울 축선에서 적의 전차대는 오후 7시쯤 수유리를 통과, 미아리 고개로 접근하더니 자정을 지나 28일 새벽 1시쯤 길음교 전방에 눕혀 놓은 수십 대의 차량 장애물을 간단히 돌파한 뒤 길음교로 진입했다. 8대의 전차대는 그대로 미아리 고개를 밀고 넘어왔다.

그때 나는 육사8기생 구대장이었던 강영수 대위가 양 손에 화염병을 들고 미아리고개 위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기억이 난다. 그는 필경 탱크에 화염병을 던지고 산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쟁지도부의 무비유환(無備有患) 때문에 젊은 나이에 쇳덩이에 온몸을 던져 산화한 경우가 어찌 강대위뿐이랴.

육군사관학교 공원 북쪽에는 조촐하지만 6·25전쟁 중 위관장교로는 최초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고(故) 심일(沈鎰)소령의 전공비가 세워져 있다. 심일 소령이 6·25전쟁 중 소대장·중대장으로 춘천·음성·영천지구 전투에서 세운 전공을 기리기 위해 육사8기생 동기회가 1975년에 건립한 이 전공비에는 이런 비문이 적혀 있다. ‘조국의 운명을 걸머졌다. 호국의 초석이 된 심일 소령의 숭고한 군인정신과 그 전공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다’.

함남 단천 출신인 고인은 45년 12월 가족과 함께 월남, 서울대 사범대학에 진학했으나 광복 후 혼란한 사회상을 겪으면서 교육자 꿈을 버리고 호국의 간성(干城)이 되기 위해 육사8기생으로 입교했다. 49년 5월 보병소위로 임관한 고인은 6·25전쟁 발발 당시 제6사단 소속으로 춘천 북방 옥산포에 배치됐다.

고인은 서울을 허무하게 적에게 내준 의정부 축선에서와는 달리 춘천 북방 38교에서 육탄특공대를 조직, 화염병과 수류탄만으로 최초로 적 탱크 2대를 격파함으로써 적 공격을 막아냈다. 이때의 전과는 적의 춘천 점령을 4일간 지연시킴과 동시에 적 작전계획을 변경케 한 통쾌한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고인은 음성군 동락리·무극리 전투, 영천 동북의 304고지 전투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고인은 51년 1월 영월 북방 마차리 일대의 적 동정을 정찰하던 중 불의의 총격을 받아 28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전사했다. 고인의 모친 조보배(趙保培)여사는 슬하에 4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심일 소령은 물론 차남 심민(沈愍)도 경찰 간부로 활동하다 순직했고, 3남 또한 서울고등학교 재학 중 학도병으로 출전해 대구지구 방어전에서 전사했다.

아들 넷 중 3형제를 나라에 바친 조여사는 수만 평의 임야를 개간해 이를 무의무탁(無依無托)한 제대군인들에게 삶의 터전으로 제공하는 등 사회사업가로 활동하다가 미담이 알려져 5·16민족상(사회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강원도 원주에 있는 이 ‘장한 어머니’ 집 마당에는 심일 소령의 동기생들이 마련한 국기 게양대에 항상 태극기가 걸려 있어 동네 꼬마들이 ‘태극기 할머니집’이라고 불렀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