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1951년 군원(軍援)에 의한 미 보병·포병학교 제1차 도미(渡美) 유학 장교단은 육본이 시행한 시험을 거쳐 선발했다. 나는 그때 기계·안강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육본으로부터 부산 구포에 있는 제3훈련소에서 카투사를 훈련 편성해 전방에 보충하는 교관 발령을 받아 근무하다가 부산 동래에 있는 보병학교 전술학 교관(대위)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시험 선발이었기에 교관이었던 나는 당시 전방 근무한 장교들에 비해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때만 해도 전쟁 중이어서 미국에 보내준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시험을 봤을 뿐이다. 그런데 보병학교 교관이 너무 많이 시험에 합격하는 바람에 모두 유학을 보내면 보병학교 수업을 못하게 될 지경이 됐다. 그러자 당시 학교장이었던 이한림(李翰林·군영·중장 예편)장군은 육본과 협의해 일부 합격자를 제외시켰다. 그때 동기생 교관 유동인(劉東仁·육사8기·준장 예편)대위 등이 시험에 합격하고도 제외된 불운한 경우였다. 역시 ‘군대는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이 실감났다.
미국의 군원에 의한 한국군 장교단의 1차 도미 교육이었기 때문에 군에서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서 6·25전쟁 전 유일하게 미국 고등군사반(OAC) 교육과정을 수료한 최덕신·최홍희(군영·소장 예편) 두 장군이 미군 장교 예절과 매너 등을 가르쳤다. 그런데 내가 육사8기 입교 시절 교장을 지낸 최덕신 장군과 내가 나중에 지휘한 6군단장을 지낸 최홍희 장군은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해외로 망명했다가 북한으로 갔다.
그리고 나서 대망의 미국 교육 파견단 250명은 그해 여름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지는 전선을 뒤로하고 9월12일 대구 육본에서 신고식을 마친 뒤 당시 육군 교육총감 이형근(李亨根)장군의 격려사와 군악대의 환송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금강환(金剛丸)에 몸을 싣고 부산항을 출발, 다음날 이른 아침 일본 사세보(佐世保)항에 기항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제너럴 존 포푸(미 해군 3만5000t 수송선)호에 승선, 태평양을 건너는 긴 항해 끝에 9월2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다시 이곳에서 우리는 특별열차 풀 맨 편으로 미 대륙을 횡단해 보병장교 150명은 포트 베닝(Fort Bening)의 미 육군 보병학교로, 포병장교 100명은 포트 실(Fort Sill)의 미 육군 포병학교에 입교했다.
조지아 주(州) 포트 베닝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보병센터로 전미 육군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교육훈련 과목은 개인화기에서부터 공용화기·독도법까지 일반학과 참모학을 두루 거치는데 당시 교장은 처치(Church)소장이었다. 포트 베닝은 멜 깁슨이 주연한 베트남전 영화 ‘우리는 군인이었다’(We were soldiers)의 전반부에 나오는 바로 그곳이다. 베트남전 참전 장병의 부인들이 고국의 포트 베닝에서 차례로 남편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전보를 받는 이 영화 속 장면은 전쟁의 참혹함과 대비돼 애절한 느낌을 준다.
포트 베닝은 말 그대로 요새(要塞)이자 군사도시였지만 가난한 나라의 전쟁터에서 뒹굴다가 간 우리에게는 별천지였다. 당시 한국군 교육생의 계급은 중위부터 소령까지였지만 모두 대위 계급장을 달고 교육을 받았다. 그중 어떤 장교는 1달러를 주고 산 국채가 자동차 경품에 당첨돼 그 차를 타고 시가행진도 하고 차량 처분 문제로 행복한 고민을 했지만 어떤 장교(육사7기)는 별천지에서 전쟁터로 돌아오기 싫어 투신 자살하기도 했다.
포트 베닝에서 6개월간 소정의 교육을 마친 우리는 52년 3월13일 수료식을 갖고 그해 4월20일 인천항을 통해 귀국했다. 도미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장교들은 대부분 전방에 투입됐다. 동기생 대부분은 연대 작전주임이나 대대 작전교육 장교의 보직을 받아 전방의 작전임무를 전담하고 일부는 육사 및 보병학교 교관 요원으로 남게 됐다. 이들의 능력과 근무성적을 인정한 육군은 그 후에도 55년까지 장교들을 선발해 도미 유학을 보내게 됐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