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73> 美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

화이트보스 2009. 5. 18. 20:22
제1話 溫故知新<73> 美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저는 모든 부모님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폴 브레임(Paul F Braim) 저 ‘위대한 장군 밴플리트’〉

1952년 4월4일,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James Award Van Fleet·1892∼1992)중장의 아들 지미 중위가 B - 29 폭격기를 조종, 북쪽으로 출격했다가 실종됐다. 그해 부활절 밴플리트 장군은 6·25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모든 부모에게 위와 같은 내용의 위로 전문을 발송했다.

6·25전쟁 중 2년을 8군사령관으로 전선에서 싸웠고, 바로 그 한국 땅에서 사랑하는 외아들 지미를 바친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 육군의 아버지’라 불린다.

밴플리트 장군은 51년 4월11일 맥아더 장군이 미 극동군 및 유엔군사령관에서 전격 해임된 사건을 계기로 미8군사령관에 부임하게 된다. 당시 맥아더의 해임은 전 미군 고급장교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6·25전쟁과 관련해서는 ‘한국 내의 국지적 군사행동’이라는 제한된 목표를 상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즉 워싱턴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8군사령관 시절에도 적극적이던 리지웨이 장군은 밴플리트에게 8군 지휘권을 물려주고 맥아더를 대신해 미 극동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되자마자 유타선(Line Utah:철원 바로 남쪽의 접촉선) 이북으로 진격할 경우 사전에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리지웨이는 또 예하 지휘관들에게 한반도 이외의 지역으로 전쟁을 확대시키는 행동을 절대로 피해야 한다고 강력히 지시했다.

이런 수세적인 상황에서 8군사령관에 부임한 밴플리트 장군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시 준비 안된 상태에서 고군분투해야 했던 우리 군을 훈련과 전력보강을 통해 오늘날의 정예군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8군사령관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소수병력으로 적과 어려운 전투를 계속하면서도 한국군 사단을 9주간씩 교대로 재훈련시킬 만큼 한국군의 전력향상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신병훈련소 설립을 지시했다. 훈련소는 51년 8월에 설립된 후 확대·개편되고 나중에 보병학교·포병학교, 그리고 통신학교로 재편됨에 따라 점점 증가하고 있던 미 군사고문단 장교들이 이런 교육훈련기관으로 발령됐다.

그는 특히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편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계획이 당시 미국 내에서도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웨스트포인트 동기생으로 52년 말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에게 간곡히 건의, 이를 관철했다.

한국군이 20개 사단으로 증편되자 그는 한국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장교단을 양성하기 위해 웨스트포인트를 모델 삼아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그는 4년제 육사 설립 및 지원을 추진해 허가를 얻어낸 후 미 육사가 한국 육사를 위해 교육과정을 제공하도록 끈질기게 요청, 미 육사에 재직 중인 사위 조지프 매크리스천 중령을 통해 많은 지원을 받았다.

52년 1월20일 이승만 대통령을 수행, 진해에서 열린 육사 개교식에 참석, 따뜻한 박수를 받은 그는 전역 후에도 모금활동을 전개해 육사 도서관을 지어 기증할 정도로 한국군 발전에 끝없는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군은 밴플리트 장군을 기념해 그의 동상을 육사 교정에 세우고 ‘대한민국 육사 아버지’라고 칭송했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