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90>박 대통령과 국과연

화이트보스 2009. 5. 18. 20:31

제1話 溫故知新<90>박 대통령과 국과연

합참전략기획국장 시절에 하루는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 집무실에 들어간 적이 있다. 의전실을 거쳐 들어갔는데 집무실에는 혼자 계셨다. 박대통령 집무실 서재 뒤에는 가로 1m, 세로 2m 정도인 커다란 한반도 지도가 걸려 있었는데 박대통령은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지도를 주시하면서 자로 이리저리 재보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 뒷모습에서 국가원수의 고독함이 느껴졌다.

방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보고를 하니 박대통령은 그때서야 뒤돌아보시며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유도탄 이야기를 꺼냈다. 극비사안이었지만 우리 군은 당시 유도탄 개발을 시작해 나는 서해안 영흥반도에서 시험 발사 때 대통령을 모시고 가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최대 사정거리를 이야기하며 “이것(한국형 유도탄)을 어디에 가져다 놓으면 김일성이 까불지 못할까” 하면서 지도 위에 자를 대고 이리저리 대보았다. 당시 북한군은 프로그(Frog) 미사일을 최전방에 배치, 36도선까지 커버했기 때문에 박대통령은 우리가 유도탄을 임진강가에 배치해 놓고 평양을 때릴 수 있어야 북한의 기습공격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국방의 초석’인 국방과학연구소(ADD)가 대통령령 제5267호에 의해 설립된 것은 1970년 8월6일이다. 임무는 국방에 필요한 병기·장비 및 물자에 관한 기술적 조사·연구·개발 및 시험과 이에 관련된 과학기술의 조사·연구 및 시험 등을 담당, 국방력 강화와 자주 국방 완수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율곡사업 초창기인 70년대에는 선진국들의 무기수출 통제 정책으로 돈이 있어도 무기를 구매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연구개발과 방위산업을 통해 자국의 무기를 충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국과연을 창설하고 해외 과학자들을 유치, 국가차원의 무기 연구개발을 적극 추진했다.

당시 국과연 초대 소장은 포병 출신의 신응균(申應均)예비역 육군중장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수류탄 만드는 능력밖에 없었다. 박대통령의 지침에 의해 해외에 나가 있는 고급 과학기술자 두뇌를 동원했다. 구성요원은 특별 우대 했다. 차 한 대와 관사, 그리고 병역 혜택이 제공됐다. 특히 신소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명하고 공학박사인 심문택(沈汶澤)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소장이 국과연 2대 소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 위상이 크게 높아지고 해외 두뇌들의 유치도 가속화됐다.

그러나 국산 장비 개발의 ‘메카’인 국과연 창설 및 해외 두뇌 유치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특히 미국은 국과연 설립 자체를 못마땅해 했다. 미국 정부의 원조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라는 기초 및 원천 기술 개발을 위한 대형 국책연구과제를 수행하는 종합연구기관을 세워 주었는데 왜 별도로 병기개발연구소를 설립하느냐는 것이었다. 필요한 병기는 미국에서 구해다 쓰고, 한국은 병기개발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자신이 총사령관이 돼 유도탄개발사업까지 추진했다. 박대통령은 71년 12월 오원철 청와대 경제2수석에게 유도탄개발 지시를 내려 이듬해 4월 국방부(합참)는 국과연에 유도탄 개발명령을 하달했다. 대외적으로는 ‘유도탄’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항공공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국과연은 마침내 78년 9월 박대통령을 모시고 유도탄 시험발사에 성공하는 개가를 올렸다.

<정리=김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