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91>율곡의 재원, 방위세 신설

화이트보스 2009. 5. 18. 20:32
제1話 溫故知新<91>율곡의 재원, 방위세 신설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중심으로 국산무기 개발이 본격 가동되는 상황에서 1974년 2월15일 북한군이 백령도 인근 공해상에서 우리나라 어선을 격침하고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6·25전쟁 이후 숱한 어선 납북 사건이 있었지만 어선 납치로 인해 이때만큼 남북한 사이에 전운이 감돈 때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우선 백령도 사건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북한은 그 이전에 50척 이상의 경비정을 서해 영해로 들여보내 긴장상태를 조성하고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 등 이른바 서해 5도를 둘러싼 일대 해역을 자신들의 영해라고 주장하며 침범을 정당화했다. 더구나 그들은 당시 북한군의 65% 이상을 휴전선 근처로 전진 배치함으로써 ‘만반의 전쟁준비를 끝냈다’며 위협을 가했었다.

나는 당시 한미1군단에서 합참에 막 배속됐을 때인데 박정희 대통령은 이때 북한이 백령도를 침공하려는 것 아니냐는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박대통령은 서해 5도의 요새화를 긴급 지시하고, 이 섬들에 대해서는 예비군·학도호국단까지 M-1 소총으로 무장토록 했다. 당시 국군은 구식 M-1 소총을 신식 M-16으로 교체하는 중이었다.

국방부는 당시 서해 5도 요새화 등 여러 긴급대책을 보고했는데 이를 계기로 군은 전주민이 대피할 수 있는 지하요새를 건설해 몇 개월분의 식량도 비축했다. 이때 박대통령은 방위성금을 대대적으로 모금하라는 지시와 함께 아울러 무기구매절차 지침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언론계에서는 방위성금 모금에 앞장섰으며 자주국방 의식이 고조된 국민들은 자진해 방위성금을 냈다. 그 금액은 1974∼75년 사이에 161억3000만 원에 이르렀다. 이 돈이 초기 율곡사업의 종자돈이 됐다. 박대통령은 방위성금 사용 내용에 대해 우선 서해방어와 해군 전력증강에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박대통령은 “방위성금은 국민이 나라를 위해 바치는 정성”이라면서 늘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곤 했다.

당시만 해도 방위성금이 총재원이었으니 무기 구입은 단기간의 임무로 인식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75년 7월 방위세를 신설, 이를 율곡사업의 재원으로 삼았다. 아울러 박대통령은 무기 선정과 소요는 합참이 담당하고, 기술적 업무는 ADD가 담당토록 하는 등 무기구매 절차에 관한 지침을 하달했다.

이 지침에 따라 국방부와 합참은 74년 3월15일 조치사항에 대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암호명 ‘율곡사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추진 기구로 이른바 ‘5인위원회’(율곡추진위원회)를 두되 그 구성은 국방차관을 위원장, 합참본부장·군수차관보·국방과학연구소장·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을 위원으로 두었다.

첫 번째 열린 5인위원회에서 율곡사업의 운영방침이 논의됐는데 기본적인 계획 수립은 합참에서 하게 됐다. 사업집행의 기본방침은 조기획득·성능보장·경제성 보장에 두었다.

당시 나는 이병형(李秉衡) 합참본부장(육사4기·중장 예편·작고) 밑에서 합참 전략기획국장을 맡고 있었다. 이 5인위원회는 나중에 경제기획원 차관이 새로 위원으로 추가돼 6인위원회가 됐다가 78년 1월에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국방부 관리차관보·인력차관보·방상차관보 등 네 명의 위원이 추가돼 ‘10인위원회’가 됐다. 그리고 78년 11월에는 대통령령으로 ‘전력증강사업추진위원회’로 변경됐다. 당시 나는 합참본부장이었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