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초 합참전략기획국장으로 부임해 가니 임동원(林東源·육사13기·소장예편)군사력소요과장이 이미 ‘전력증강 8개년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율곡계획(栗谷計劃)의 초안을 기안해 놓고 있었다. 나는 이 초안을 토대로 이듬해 군단장으로 나가기 전까지 1년 동안 합참에 근무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율곡계획에 대해 두 차례 보고할 기회를 가졌다.
그것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작업이었다. 우리 군에서 아무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이는 자주국방의 3대요소로 우리 스스로 작전·전략개념을 세우고, 무기체계도 우리가 선정(개발 아니면 획득)하고, 그 비용도 우리가 정하는 등 모든 것이 처음 해보는 생소한 일이었다.
나 역시 육군에서 주로 작전분야에서만 근무하다가 왔기 때문에 타군(他軍)의 장비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전략기획을 하다보니 합참에 가서 새로 외야 하는 장비 이름만도 100여 가지나 됐다. 그래서 합참에 가서 맨 먼저 한 일은 영어사전을 찾으며 무기체계와 장비를 암기하는 것이었다. 이름을 외기도 힘든데 가격·소요량 등 각군에서 받은 데이터까지 줄줄 외야 하는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다.
이렇게 해서 임대령과 나는 우리 군의 독자적인 전력을 가지고 처음으로 전력을 짜보는 일을 하게 됐다. 일단 남북한 군사력 격차가 생겨 최소한 독자적 능력으로 대응할 수 있을 만한 군사력을 갖추려면 8년 동안 준비해야 한다는 개념에서 ‘전력증강 8개년계획’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1차 보고는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서울 홍릉에 있던 국방과학연구소(ADD) 회의실에서 이뤄졌다.
박대통령과 서종철 국방장관, 합참의장, 각군 참모총장(차장), 청와대 비서실장과 오원철 경제2수석 등 관련 수석비서관 등이 참석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속담에 하필이면 시집가는 날 등창 난다는 말이 있듯이 공교롭게도 대통령 보고 전날 진해 해군기지에서 신병들을 태우고 가던 해군함정이 침몰, 100여 명의 병사가 수장(水葬)당한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그 때문에 해군은 참모총장이 사고 수습차 현장에 내려가 차장이 대신 참석했다. 하필이면 사고소식이 신문에 시꺼멓게 대서특필돼 박대통령의 심기가 불편할 때 보고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을 수밖에.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내 책임도 아니었고, 그럴수록 전력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전체보고를 드린 후 박대통령께 건의했다. 이 사업은 고도의 보안을 요하는 사안인데 ‘전력증강 8개년계획’이라고 말하면 누구나 알게 되므로 ‘코드’(암호)화의 필요성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박대통령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해서 충무·을지 등 역사 속의 명장들과 10만 양병설(養兵說)을 주창한 율곡 등으로 일람표를 만들어 올리니 박대통령이 “율곡이 좋겠다”며 직접 낙점했다. 물론 10만 양병설의 의미를 함축한 선택이었다.
나는 내친김에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의 사례를 들어 보안 유지를 위해 국회(국방위원회)에도 상세보고를 안할 수 있도록 박대통령에게 요청해 승인을 받았다. 이처럼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국방위원장인 공화당 최영희(崔榮喜·군영·중장 예편)의원에게도 ‘전력증강 8개년계획’의 총액만 얘기하고 구체적인 사업계획은 보고하지 않았다. 이처럼 ‘율곡계획’은 기밀사항이었기 때문에 국방부가 발표한 초기 율곡사업의 재원(財源)인 방위성금 사용 내역 말고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정리=김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