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95>자주국방과 율곡사업의 서막

화이트보스 2009. 5. 18. 20:36
제1話 溫故知新<95>자주국방과 율곡사업의 서막

내가 합참에서 한국군 최초의 자주국방을 위한 전력증강 계획인 율곡계획을 박정희 대통령께 두 차례 보고하는 ‘행운’을 안은 것은 이병형(李秉衡·육사4기·중장 예편·작고)본부장 밑에서 임동원(林東源·육사13기·소장 예편)전략기획과장과 함께 일하는 행운을 얻은 덕분이라고 말한 바 있다.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내가 합참 전략기획국장으로 부임한 것은 1974년 2월14일이고 박대통령께 율곡계획을 1차 보고한 것은 부임 11일 만인 2월25일이었다. 합참에 전략기획국이 생긴 것부터가 두 사람의 작품이었다. 율곡계획은 두 사람에 의해 이미 1년 전부터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주로 임동원 당시 전략1과장의 기억에 의존한 것이다.

이병형 본부장에 의해 임동원 대령이 지명 차출돼 합참에 불려간 것은 73년 3월이었다. 이장군은 임대령에게 자주국방을 위한 한국군의 독자적인 군사전략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하게 된다. 이장군의 지시에 따라 임대령은 한 달 만에 ‘지휘체계와 군사전략’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낸다. 73년 4월19일 이장군은 이 보고서를 가지고 마침 군지휘연습 기간에 합참을 방문한 박대통령께 보고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73년 4월19일은 자주국방과 율곡사업의 서막을 올린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필요가 있다.

이미 60년대 후반부터 1·21사태,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 북한의 일련의 도발과 주한미군 감축 등을 계기로 70년대 초반부터 박대통령은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걸고 향토예비군을 창설했지만 하드웨어에 해당하는 총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 강력히 요청해 우리 손으로 M16 자동소총 및 실탄 생산공장을 건설하던 때가 73년이고, 그 생산품이 나온 해가 74년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이장군이 박대통령께 보고한 ‘지휘체계와 군사전략’의 핵심은 자주국방을 위해서는 미국이 만든 장비와 작전계획, 그리고 군사전략에 의해 움직이는 군대가 아닌 자주적 군사전략이 필요하다는 것과 지금부터 합참이 중심이 돼 자주적 군사전략을 세우고 그에 입각해 자주적 군사력을 건설하겠으니 군통수권자인 대통령께서 승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들은 박대통령은 “진작부터 우리 군에서 이런 보고가 나오기를 기대했다”며 “이런 보고를 받게 돼 대단히 기쁘다”고 극찬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이장군에게 세 가지 지침을 하달했다.

첫째, 언젠가는 유엔군사령부가 해체될 터이고 주한미군 지상군도 떠날 것이다. (작전지휘권이 없어) 합참이 현재 ‘양로원’ 신세지만 이런 때에 대비해 3군을 통합, 작전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기구를 조정하고 참모를 훈련시켜라.

둘째, 이병형 장군이 건의한 대로 서둘러 기본군사 전략을 세워라. 그리고 거기에 따라 장기 군사력 계획을 작성해 보고하라.

셋째, 지난해(72년)부터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됐는데 이는 철강·조선 등 6대 전략사업을 중심으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그러니 70년대 말에 가면 고도의 과학기술이 필요한 정밀무기를 제외한 어지간한 무기는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생길 것이다. 즉 중화학공업을 토대로 방위산업을 육성할 것이니 합참은 그에 맞춰 국내 생산 무기소요를 제기하는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주국방을 추진할 율곡사업의 발동이 걸린 것이다. 율곡사업 철학의 기초를 닦은 이장군도 당시 우리나라의 유일무이한 전략가였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도 박대통령은 보기 드물게 훌륭한 군사전략가였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