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야기/溫故知新

제1話 溫故知新<96>30년 전략방안 착수

화이트보스 2009. 5. 18. 20:36
제1話 溫故知新<96>30년 전략방안 착수

1973년 4월19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지휘체계와 군사전략’(군사기밀)을 보고한 이병형 합참본부장과 임동원 전략기획과장은 박대통령의 세 가지 지침에 따라 합참을 개편하고 기본군사전략과 군사력 건설계획을 수립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게 된다.

다음은 임동원 당시 전략기획과장의 증언이다.

“ ‘지휘체계와 군사전략’을 보고받은 박대통령의 승인을 계기로 저와 이병형 장군은 하루 두 시간씩 두 달 동안 토론하며 단군 이래 최초의 독자적인 군사전략을 세우게 됩니다. 물론 합참의 다른 장교들에게는 일체 비밀에 부쳤습니다. 저와 이병형 장군은 기본군사전략에 30년 계획으로 전략적 정세전망을 하고 자주적 전략개념의 목표와 유형, 군구조 발전 방향, 군사력 건설의 개념 등을 포괄하면서 10년씩 3단계 발전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니 올해로 꼭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것은 ①자주국방체제 확립 단계 ②국방력 현대화 및 재정비 단계 ③전략적 적응 단계의 3단계였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1급 비밀이었다. 이처럼 군사력 건설 방향의 1단계는 우선 북한에 대적할 수 있는 방위전력을 먼저 건설한다는 것, 2단계는 억제전력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 3단계는 그때 정세를 전략적으로 판단해 공세적 전력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방위전력은 북한의 전력을 100으로 했을 때 70∼80% 정도는 돼야 하는데 당시는 겨우 절반 수준이었다. 억제전력은 북한이 100이면 우리는 100∼110% 정도는 돼야 했다. 그리고 공세전력은 그보다 훨씬 더 우월한 전력을 가져야 했다.

이렇게 해서 1단계 10년은 방위전력 건설을 목표로 73년 7월27일 합동참모회의에서 육·해·공군 군사전략을 통합한 기본군사전략을 정식으로 채택하게 된다. 말하자면 기본군사전략을 토대로 10개년 군사력 건설계획(나중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주기에 맞춰 8개년 전력증강 계획으로 바뀜), 즉 율곡계획 작성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합동참모회의를 계기로 합참은 각군에 ‘장기 국방력 건설계획 작전지침’을 하달했다. 즉 합참은 기본군사전략에 토대를 두고 더 발전시켜 각군의 군사력 건설계획을 10년을 목표로 작성, 73년 11월 초까지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니 해·공군이 난리가 날 수밖에. 사실 그때까지는 군이 육군밖에 없었고 해·공군은 있으나마나 한 ‘찬밥’ 신세였는데 육군과 동등한 군사력 건설계획을 짜보라고 하니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해·공군의 경우 참모총장이 군내의 최고 엘리트 장교들을 차출해 태스크 포스를 만들어 총장 지휘 아래 연구하게 했다. 이번 기회에 독립국가 군대로서 3군 균형발전을 꾀하자는 것이었다.

당연히 육군은 크게 반발했다. 육군 작전참모부장 Y소장은 합참의 군사력 건설계획이 탁상공론이라며 “미군이 있고 육군이 있으면 되는데 해·공군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길길이 뛰면서 “임동원 대령을 옷 벗기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물론 그것을 막아내지 못할 이병형 장군이 아니었다. 임동원 대령과 함께 율곡계획의 철학 기초와 초안을 마련한 이병형 장군은 모두 인정하듯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무이한 전략가였다. 저서로 자신의 전쟁경험을 생생히 기록한 ‘대대장’ ‘연대장’이 있는데 이는 육군대학 장교들이 애독하는 전략서다.

이병형 장군은 올해 암으로 작고했는데 회고록을 남기지 않고 가셔서 너무 아쉽다.

<정리=김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2003.11.01